지난 8월 12일에서 26일까지 삼주간 화요일마다 귀농한 도시농부들과 함께하는 특강이 있었습니다. 지역 활동에 바쁜 농부들과 만나기 위해서 온라인으로 진행이 되었고, 오히려 바쁜 일을 끝마친 저녁시간 대에 각자의 집에서 공간의 제약 없이 만날 수 있어서 편안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른 일정이 있어 참가하지 못한 분들께 귀농한 세 농부들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곡성으로 귀농한 청년 임진실의 이야기 / 8.12(화)
따로 또 함께하는 농부의 삶
임진실 농부는 귀농한지 3년차인 30대 청년 농부입니다. 그는 대학 때 농활을 간 농촌에서 삶이 ‘살아있다’라고 느꼈습니다. 그에게 도시의 삶은 경쟁을 통해 남을 죽이는 삶이며 도시는 죽어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임 농부는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며 함께 사는 삶을 꿈꿨습니다.
임 농부는 휴학을 하고 우프를 통해 처음으로 전북 장수와 제주도에서 농장살이를 시작합니다. 농산물 판매를 통해 삶을 유지하는 현실적인 농민의 삶을 마주하는 한편, 유기농 농사, 토종 씨앗과 전통적 농법이라는 세계도 접했습니다. 이후 인천으로 와서 도시농부 기초과정과 전문가 과정을 거치며 도시에서도 다원적이며 공동체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임 농부는 호기롭게 집과 먼 곳에서 100평 밭을 일구었습니다. 첫 농사가 잘 되지는 않았지만 경험이 되었습니다. 인도농(인천도시농부네트워크)에서 상근활동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많이 배우기는 했지만, ‘나의 농사’는 어려웠습니다. 1인 가구이고 농사 외의 일을 하느라 바쁘다보니 유기농이나 채식이 잘되지 않았고, 자신의 모순적인 삶을 깨달았습니다.
인도농에서 안식년을 가지며 임 농부는 '청년 자자공(자연·자립·공유)' 프로그램에 참여를 했습니다. 곡성에 내려가 토종씨앗을 이용한 논농사의 전 과정에 참여하며 수확까지 하게 됩니다. 그는 도정기로 직접 쌀을 도정해 밥까지 지어 먹었습니다. 이후 임 농부는 인도농을 떠나 곡성에 정착합니다. 활동가보다는 자신의 농사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집 구하는 문제였습니다. 농촌에 빈집은 많으나 세컨하우스나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는 집으로 쓰이고, 오래 비워져 있어 폐허가 되었거나 곰팡이가 뒤덮고 있어서 살만한 집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동네 이장님한테 이야기하고 발품도 많이 팔아서 작년 8월에야 임 농부는 룸메이트를 얻어서 한 채의 집을 구했습니다.
임 농부는 현재 묵은 밭을 구해서 직접 밭을 만들고 있습니다. 콩과 들깨는 작목반을 꾸려서 함께 하고, 논농사도 여럿이 함께 짓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급해서 키워내기는 어렵기 때문에 자연이 주는 것을 채집하기도 합니다.
임 농부는 자자공 프로그램과 협동조합을 통해 농사 외에도 용접, 목공, 옷 만들기 등 많은 것을 배웠고, 여전히 공동체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공구 사용이 자연스러워졌다고 합니다. 반드시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만들어본 경험을 갖게 된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공동체에 속해 있어서 모임이 많지만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리면 주변에서 인정해줍니다.
지금 임 농부는 자자공 운영진으로 일하며, 지속가능한 소농을 뒷받침하고 생태적 가치를 이어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농사를 기반으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방법으로 오일장에 두부를 만들어 팔고, 지역 장터 및 기관과 연계하여 두부 판매 및 교육 활동도 합니다. 그는 지역청년활동가 지원사업으로 지원금을 받습니다. 혼자 살고 소비도 줄여서 생활비가 많이 들지는 않지만 지원금은 아무 기반이 없는 임 농부와 같은 청년에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임 농부는 지역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풀어내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난개발과 쓰레기 문제 등이 있습니다. 지역이 도시가 필요한 걸 제공하는 게 당연하다는 시선이 그는 불편합니다. 지역민들이 이런 저항 운동에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틈모임>을 만들어 강연, 책모임, 기후정의행진 등을 기획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임진실 농부의 자자공과 항구네 협동조합 이야기가 더 궁금해요.
2. 실상사농장에 사는 오창균의 이야기 / 8. 19(화)
농사는 재미가 있어야 된다.
오창균 농부는 시골 출신이라 오히려 농사를 하며 살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도시로 올라와 평범한 도시민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IMF때 실직을 하고 월급쟁이로 사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급하게 준비하기보다 여유를 두고 살펴보기로 하고, 십 년 후에 귀농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영업을 시작하고 텃밭농사를 지어보기로 합니다.
인도농을 통해 농사짓는 교육을 받고 텃밭 농사를 시작하자 오 농부는 그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하던 일을 접고 강사과정도 이수해서 텃밭 강사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기업의 대표가 되며 할일이 많아지니 에너지가 떨어지고 일이 더 힘들어졌습니다. 시흥의 만평짜리 공동체 텃밭 만드는 것을 돕다 아예 그곳에서 몇 년간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후, 땅이 개발되자 농사를 접고 다른 곳을 알아보다 남원에 있는 실상사 농장과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곳에서는 독방에 숙식이 제공된다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고 합니다.
실상사 농장은 지리산 인근이라 자연환경이 너무 좋고 공동체 생활이라도 개인의 자유가 있어서 오 농부에게 잘 맞았습니다. 이곳은 일반적 귀농과 다른 점이 많습니다. 절에 자급하는 게 목적이라 수확의 대부분은 절로 들어가고 남은 것은 판매합니다. 오 농부는 농장을 운영하며 월급을 받았습니다. 적자가 나더라도 절에서 일정 금액을 지원해서 항상 같은 금액을 받기 때문에 생활에 불편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농사를 잘 지어야 했습니다.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해서 농사가 어려운데다, 절에 공급도 하고 외부 판매도 해야 했습니다. 오 농부는 사람이 하는 일인데 의지가 있으려면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익이 생길 때 수당을 받는 것을 농장에 제안했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실상사 농장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홈페이지를 통하거나 절에 전화해서 문의해도 되고, 자원봉사를 통한 단기 체류도 가능합니다. 오 농부는 도시농업을 통해 다품종 농사를 지은 게 실상사에 자리 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와서 이전보다 산출이 많이 늘었다고 자부심을 내보였습니다. 지금은 오 농부가 들어갔던 귀농학교가 없어져서 그는 새로운 농사 학교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오 농부는 수도권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서 남원으로 귀농을 했습니다. 아이들과 와이프는 그와 함께 살지 않고, 가족은 서로의 삶을 인정하고 각자의 삶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결정을 해놓고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사진 찍고 글 쓰는 것도 했는데, 지금은 글이 너무 어렵게 느껴져서 글 쓰기를 그만둔 것처럼 하던 데로 계속 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진 찍는 것은 농사일에 도움이 되어 지금도 하고 있는데, 같은 날짜에 찍은 사진을 보고 농사일에 도움을 얻을 때가 많다고 합니다.
오 농부는 농사일이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힘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적당히 조금씩 몸에 무리가 안 갈 정도로 자주 들여다보는 게 농사에 더 도움이 되고, 하는 사람도 재밌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농사일을 노는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일 하려고 하면 안 보이는 게 있는데, 노는 것처럼 밭에 나가면 여유가 생겨서 더 많은 것이 보입니다. 아침 일찍 나갈 때는 운동을 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나가서 작물 상태를 살피고, 힘들지 않게 가볍게 일합니다. 일찍 일어나니까 낮잠도 즐깁니다. 그는 농사일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습니다.
농사보다 재밌는 게 있냐는 질문에 오 농부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는 바다가 있는 곳에서 농사짓고 싶은 마음이 있고, 낚시라는 것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바닷가 고흥에 지인이 산다니 언젠가는 바다 근처에서 그를 볼 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3. 제주도에서 농부로 사는 김안나의 이야기 / 8. 26(화)
내 인생의 키워드는 재미, 자유, 평화
어느 날 문득, 김안나 농부는 자신의 경차 모닝에 취사도구와 각종 양념, 김치 등을 넣고 도시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불빛, 속도 등 현란한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꼈고 갱년기 우울증까지 합쳐져 더 이상 도시에 있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토종씨앗이나 씨드림에서 활동하며 십여 년 도시농부 생활을 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제주에서 김 농부는 세계여행을 간 부부의 집에서 몇 개월 동안 살며 그들의 밭에서 농사도 지었습니다. 여행을 떠난 부부가 이웃의 뒷 담화를 피하기 위해 농사다운 농사를 지으며 살아주는 조건으로 집을 빌려준 것입니다. 김 농부는 여행을 제주로 자주 다녔고, 평소 물을 좋아했던 터라 제주에 산다는 것이 좋았고, 농사까지 지을 수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제주에 머물며 예초를 하고 더울 때면 입은 옷 그대로 바다에 들어가 몸을 식혔습니다. 당시 삭발에 가까운 머리 모양을 하고 있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런 모습으로 있어도 괜찮을 정도로 제주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습니다. 세계적인 관광지이고 섬이라는 특성상 외지인이 많은 곳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토박이들은 사람이 들고남에 신경 쓰지 않아서 오히려 편했습니다. 부모님이 살던 고향에 어느 정도 기반이 있고 그곳으로 귀농도 가능했지만, 김 농부는 비혼이고 사회적 시선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성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고향의 폐쇄적인 분위기, 서로가 사정을 모두 알고 참견하는 분위기에 적응이 어려웠습니다.
김 농부는 귀농 후에도 아버지에 대한 부양을 가족과 함께 책임져야 해서 돈벌이에 나서야 했습니다. 그는 몇 년을 농업노동자로 살았습니다. 동 트기 전에 일터에 도착해서 해 질 때까지 일하고 일당을 받아 생활했습니다. 동네 지인에게 알아봐서 허름한 밖거리(제주의 전통가옥은 안거리, 밖거리로 나뉜 두 채로 되어 있습니다. 집주인이나 부모가 안거리에 살고 밖거리는 결혼한 자녀가 살거나 손님맞이나 창고 등으로 사용됩니다.)에서 살면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농사짓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열심히 노동자로 살며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제주문화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사람들과 관계가 깊어졌습니다. 지금도 귤 농사가 잘 안되어 돈이 모자라다 싶으면 일당을 벌러 나갑니다. 제주도는 농업 외에도 펜션 청소 등 아르바이트를 할만한 일자리가 많습니다.
인연이 닿아서 드디어 김 농부는 300평 귤 농사를 짓게 됐습니다. 버려진 귤 밭이라 개간하다시피 했지만 감지덕지했다고 말합니다. 이후 1500평을 거쳐 지금은 2000평 귤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직접 수리해서 살면 낮은 금액으로 빌릴 수 있는 집도 구했습니다. 그는 제주살이 10년차가 되어서야 겨우 안정적인 삶을 이루었습니다. 9년 동안은 끊임없이 달려왔습니다. 농사짓고 집을 구하고 사람들과 교류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했습니다. 올해 드디어 농사만 짓고 농업 노동자로 일하지 않으며 살 정도가 되었다고 그는 긴 한숨을 내쉽니다.
김 농부는 도시농업이라는 험지, 악조건에서 농사를 지었던 것이 귀농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후대를 생각하며 유기농으로 호미 한 자루로 농사짓자는 마음이 지구를 생각하는 마음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귤 농사의 대부분을 어떤 화학약품도 쓰지 않고 예초 정도만 해주고 있습니다. 나무 상태를 보고 꼭 필요한 경우이거나 밭주인이 원하는 경우에만 친환경 약재를 사용합니다. 다른 밭에서 약을 치더라도 방풍림이 있고, 김 농부의 밭이 다른 밭들과 떨어져 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김 농부의 귤 밭은 병충해 피해 때문에 다른 밭 보다 적게 수확되지만, 오히려 기후 문제가 생기니까 그 피해는 크지 않다고 합니다. 귤 껍질을 얕게 하려고 비료를 과하게 치는 경우 피해가 많지만, 김 농부의 딱딱한 귤은 은 이런 상황에도 어느 정도 소출이 나옵니다. 그는 아주까리나 생선 등을 넣은 친환경 퇴비를 쓰고 있습니다.
김 농부는 귀농을 하며 농부, 농사, 농업에 대한 하대 문화가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큰 오빠는 매번 뭘 하냐고 묻습니다. 농사를 제대로 된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혼이라 홀로 사는 외로움도 있고 농부로서 일할 때 고되기도 합니다. 여성이라 안전 문제도 있어서 집 얻을 때 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에게는 함께 밥 먹고 술 마시고, 잘했다고 말해주고 안아줄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토종씨앗으로 이어진 인연들과 제주여성농민회, 자연그대로농민장터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젊었을 때 인권 운동을 해서 관공서와 친하지 않았는데, 농협이나 읍사무소, 농업기술센터 등 관계기관의 지원정책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0.5%대 대출이자가 있어서 정착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 농부는 재미와 자유, 평화가 있어서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농사는 재미가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습니다. 작물을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지금 이것을 할까, 나중에 저것을 할까. 모든 것은 농부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결과 또한 농부가 모두 책임집니다. 씨앗이 작물이 되고 그것이 돈이 되었을 때의 기분 좋은 효능감도 있습니다.
농부는 작물을 돌보지만, 작물이 농부를 돌보기도 합니다.김 농부는 풀을 뽑고 있으면 평온함을 느낍니다. 갑갑할 때 밭에 가면 답답함이 가십니다. 그리고 농사는 정년이 없습니다. 육체를 사용하며 건강하게 살고, 소출을 거둬서 안정된 노후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는 제주도에 와서 자연사를 많이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김 농부는 농사와 일상이 매순간 명상이 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현실에 머물면서 행복한 것을 명상이라고 합니다. 농사는 늘 현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농사 자체가 명상이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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