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인천에서부터 비구름을 몰고 왔소
가을비는 농부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땅이 질어서 작물을 수확할 때 번거롭고, 젖은 작물을 말리는 것도 꽤 힘들다. 하필 통일쌀을 추수하는 날에 비가 많아 와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민통선에 들어가기 전 버스에 올라탄 농민이 어쩌다 인천에서부터 비구름을 몰고 왔냐며 농담을 건네니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날이 좋지 않아도 함께 한다면 즐거울 수 있다.
어느새 통일쌀이 심어진 논에 도착했다. 흰색 바탕에 파란색 한반도가 그려진 한반도기가 반갑게 맞이한다. 손모내기를 했던 오월부터 몇 개월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벼가 자라서 고개를 숙였다. 낟알이 영근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벼 여기저기에 붉은색 우렁이 알이 달라붙어 있었다. 친환경으로 재배하니 이런 모습이 가능했다. 철원은 10월 하순부터 쇠기러기가 모여들고,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면 재두루미와 흰 두루미 몇 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한다.
내년에는 토종종자를 이용해서 남과 북의 볍씨를 함께 심을 겁니다
두루미농법으로 수확한 쌀이 친환경 기업으로 유명한 파타고니아 로고를 달고 VIP고객들에게 제공된다고 한다. 농민들은 기쁘지만 국내 기업이 아니어서 아쉽다. 인지도가 높은 삼성 등 국내 대기업이 함께하면 환경 뿐 아니라 통일관련 행사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년에는 토종종자를 이용해서 남과 북의 볍씨를 함께 심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통일논에 통일 볍씨라니, 벌써부터 내년 모내기가 기대가 된다.
이미 추수한 다른 논에 초록색 새 싹이 자란 모습이 보였다. 농민에게 물어보니 날이 너무 따뜻해서 그렇다고 했다. 기후변화로 어쩌면 이모작도 가능해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식량자원인 쌀에는 좋을 수도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사과는 재배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 외에도 다른 작물과 곤충, 새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까.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무섭게 느껴진다.
벼 베는 것보다 발 빼는 게 더 힘들어요
비가 멈추지 않아서 모두 우비를 입고 논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논에 물이 차서 마치 뻘 같았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벼 베는 것보다 발 빼는 게 더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낫을 사용하기 때문에 옆 사람과 사이를 벌리는 것도 중요했다. 아이들과 벼베기가 처음인 이들 위주로 논 가장자리에서 짧은 시간 동안 벼를 베었다. 수확한 벼를 들고 사진 촬영을 하고 벼베기를 끝냈다. 다행히 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
왜 왔냐구요? 밥 먹으러 왔어요
점심식사와 다른 일정은 국경선 평화학교로 장소를 변경해서 진행되었다. 농민회에서 준비한 푸짐한 식사를 하고 철원의 대작 막걸리를 마셨다. 이번 벼베기 행사에 참가한 목적으로 오로지 밥 먹으러 왔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을 만큼 맛있는 밥이었다. 쌀을 먹으면 살 맛 나기 마련이다.
가장 새끼를 잘 꼰 사람에게 올해 수확한 철원오대쌀을 보내줍니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볏짚이 놓여있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손으로 볏짚 꼬는 방법을 배우는 행사가 마련되었는데, 시작을 알리기도 전에 시작되어 버린 셈이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옆 사람이 하는 걸 어깨너머로 배우며 새끼를 꼬기 했다.
볏짚 5~6줄기를 들고 끝부분에 매듭을 지어 묶는다. 양반다리로 앉아 끝부분을 발로 밟아서 고정시킨다. 둘로 나눈 볏짚 뭉치를 왼 손바닥 위에 모두 올려놓고 오른손을 펼쳐 볏짚을 꾹 누르며 왼손바닥과 교차시키면 두 뭉치의 볏짚이 각각 나선을 지으며 꼬인다. 각각 꼬인 두 뭉치의 볏짚의 끝을 서로 교차시키고 풀리지 않도록 발을 옮겨 밟아 고정시킨다. 다시 왼 손바닥 위에 두 뭉치의 볏짚을 놓고 손바닥을 교차시키는 것부터 반복한다. 이 때 손바닥에 물기가 있어야 새끼를 잘 꼴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침을 뱉어가며 했다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우리는 물컵을 놓고 손바닥을 물에 적셔가며 했다.
가장 새끼를 잘 꼰 사람에게 올해 수확한 철원오대쌀을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하자, 사람들 사이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들 더 열심히 새끼를 꼬았다. 다 꼰 새끼를 손에 들고 비교하고 자랑하는 시간을 가졌다. 줄넘기나 빨랫줄로 써도 될 정도로 긴 새끼가 있었고, 탐스러운 머리꽁지처럼 굵게 만든 새끼도 있었다. 두 갈래로 땋은 머리모양을 만든 어린이가 가장 멋진 ‘저 새끼’로 최종 선정되었다.
벼를 홀태에 넣어 낟알을 훑는 체험
볏짚을 꼰 후에는 수확한 벼를 홀태에 넣어 낟알을 훑는 체험을 했다. 홀태는 탈곡기 이전에 쓰이던 낟알을 터는 기구로 커다란 빗을 세워놓은 것처럼 생겼다. 벼를 홀태 위에서 내리쳐서 빗살에 낟알을 끼워서 터는 방식이었다. 벼의 줄기는 빠져나가고 낟알만 빗살에 걸려 쏙쏙 빠져서 바닥에 모였다. 현대에 보기 힘든 옛날식 농기계라 너도나도 모여들어 홀태에 벼를 내리쳤다.
‘생태계 회복’ ‘식량 안보’ ‘기후위기 극복’ ‘평화통일’ ‘할아버지 다리 낫기를’
긴 리본에 각자의 소원을 써서 새끼줄에 묶으며 소원 성취를 기원했다. ‘생태계 회복’, ‘식량 안보’, ‘기후위기 극복’, ‘평화통일’, ‘할아버지 다리 낫기를’ 등 세상과 국가, 가족의 안녕을 바라는 소원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우리 가락으로 모인 사람들을 통일시켰다
풍물패 오합지졸과 농민들이 함께 풍물을 치며 신명나는 시간을 가졌다. 비 때문에 논에서는 풍악을 울릴 수 없었지만, 평화 학교에 오니 비가 그쳐 신나는 장단을 들을 수 있었다. 모두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제 철원을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아쉬움 속에 모두가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모였다. ‘우리의 소원’을 소리 높여 부르며 평화학교에서 평화와 통일을 기원했다. 언제 불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였지만, 노랫말은 잊지 않았다. 이십대 이하의 젊은 세대는 이 노래를 몰라서 함께 부르기 어려웠다고 나중에 말을 전했다. 그럼에도 접경 지역인 철원에서 통일과 평화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젊은 세대의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통일에 대한 노래를 부를 때 뭉클함을 느꼈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각자의 소회를 나눴다. 버스 안에는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의 회원들과 회원은 아니지만 행사 소식을 듣고 참가한 인천 지역민, 전교조 인천지부의 교사들이 함께 있었다. 철원 농민과의 간담회가 없어서 아쉬웠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볏짚 꼬기나 벼 훑기 등 하기 힘든 체험을 해서 좋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을 가르치는 교사는 아이들과 모내기 수학여행과 벼베기 수학여행을 함께 가고 싶다고도 했다. 통일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는 달라져서 관심이 많지 않은데, 이참에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는 학부모의 말도 나왔다. 함께 모여 손을 잡고 통일에 대한 노래를 부를 때 뭉클함을 느꼈다는 얘기가 많았다.
통일이 될 때까지 통일 운동을 할 거니까 결국 통일은 되고 말 거라는 철원 농민분의 말이 떠오른다. 두 갈래의 볏짚을 하나로 꼬는 것은 남과 북의 만남을 바라는 의미도 있다. 철원은 통일쌀을 기르고 한 쌍이 평생 함께 산다는 두루미를 보호하는 곳이다. 철원에서 통일에 대한 열망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남한과 북한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날을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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