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소서] 비와 풀과 함께 사는 법

하룻밤 사이에 버섯이 돋았다.
비가 며칠 이어진 뒤 아침에 텃밭에 나가보면, 멀칭해둔 마른 풀 더미 위로 자잘한 버섯이 우산을 펴고 올라와 있다. 어제까지 없던 것인데 심은적도 없는 녀석이 올라왔으니 놀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좋은 징조이다. 버섯은 죽은 유기물(리그닌, 목질)을 분해하는 균류(미생물)이다. 마른 풀과 낙엽을 흙으로 되돌리는 일을 한다. 흙 속에서 그 일이 한창이라는 뜻이다. 눈에 보이지 않던 흙의 살림이, 장마 습기를 빌려 잠깐 얼굴을 내민 것이다. 소서(小暑)의 텃밭은 그렇게 젖은 채로 부산하다.
절기 이야기: 작은 더위, 그러나 만만치 않은
소서(小暑)는 24절기 중 열한 번째 절기로, 양력 7월 7일 무렵에 든다. 한자를 풀면 '작을 소(小)'에 '더울 서(暑)', 말 그대로 '작은 더위'이다. 뒤에 올 대서(大暑)에 견주어 작다는 것이지, 결코 만만한 더위가 아니다. 게다가 이 무렵은 장마와 겹친다. 더위와 습기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후텁지근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절기이다.
소서를 둘러싼 옛말은 대개 바쁜 손과 닿아 있다. "소서 때는 새 각시도 모심는다"는 말이 있다. 모내기가 늦어진 논이라도 소서 안에는 마쳐야 한다는 뜻이다. 이 시기를 넘기면 벼가 제대로 여물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소서 모는 지나가는 행인도 달려든다"는 말도 같은 결이다. 손이 워낙 달려 오가는 사람까지 붙잡아 일을 시킬 만큼 바빴다는 뜻이다. 망종에서 하지로 이어진 그 바쁨이 소서까지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장마와 얽힌 말도 빼놓을 수 없다. "오뉴월 장마에 돌도 큰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이 무렵 만물이 물기를 머금고 왕성하게 크는 것을 두고 이른 말이다. 작물도 풀도 하루가 다르게 웃자란다. 반가운 일이면서, 동시에 손이 바빠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소서 무렵의 비는 그렇게 반갑되 지나치면 탈이 난다. 모판에는 물이 필요하지만, 너무 오래 내리면 밭작물이 물러버린다. 옛 농부들은 이 무렵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가 적당히 그쳐주기를 빌었다. 가뭄도 걱정, 장마도 걱정. 여름 농사는 늘 물과 밀고 당기기였다.
농사 이야기
하지에 감자와 마늘을 캐던 손길이, 소서에 이르면 손길의 성격이 거두는 손에서 지키는 손으로 바뀐다.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텃밭의 풍경이 달라진다. 하지에 미리 멀칭을 두텁게 깔고 물길을 터둔 밭이라면, 이제 그 준비가 시험대에 오른다. 비가 며칠씩 이어지고, 잠깐 그쳤다가 다시 쏟아진다. 흙은 늘 젖어 있고, 잎에는 물기가 마를 틈이 없다. 이 눅눅함이 문제이다. 습기는 곰팡이병과 무름병이 번지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소서의 텃밭에서 농부가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바로 이 병해이다.
병은 대개 잎이 젖어 있는 시간이 길수록 잘 생긴다. 그래서 소서의 텃밭관리는 바람이 지나갈 길을 내주는 데 있다. 잎과 잎 사이가 빽빽하면 습기가 고이고, 습기가 고이면 병이 든다. 웃자란 곁순을 솎고 땅에 닿는 아래잎을 훑어내어 포기 사이로 바람이 통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장마철 병 관리의 근본이다. 약을 치는 일보다 바람길을 트는 일이 먼저이다.
비가 잦으면 작물만 자라는 게 아니다. 풀이 무섭게 자란다. 비 그친 다음 날 나가보면 어제 없던 풀이 무릎께까지 올라와 있다. 하지만 생태 텃밭에서 풀은 무조건 뽑아 없애야 할 적이 아니다. 뿌리가 흙을 붙들어 폭우에 흙이 쓸려나가는 것을 막고, 뽑아 눕히면 멀칭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다만 작물의 숨통을 조일 만큼 우거지면 정리가 필요하다. 이때도 뿌리째 뽑기보다 낫으로 베어 그 자리에 눕히는 편이 낫다. 흙을 덜 뒤집어야 빗물에 흙이 덜 씻긴다.
한편으로 하지에 감자와 마늘을 캐고 생긴 빈자리에는 늦콩이나 들깨, 열무 같은 것들이 이미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것이다. 망종에 심은 콩은 잎이 대여섯 장 나며 순을 질러줄 때가 되었고, 그 무렵 심은 녹두는 벌써 꼬투리가 까맣게 익어 하나둘 따내야 한다. 거두어 비운 자리를 다른 생명이 채우고, 자란 것은 손질을 기다리며, 남은 작물은 병과 습기를 견디며 열매를 키운다. 소서의 밭은 겉보기엔 축 늘어져 있지만, 속으로는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오뉴월 장마에 돌도 큰다"는 옛말 그대로, 이 무렵 텃밭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자란다. 그 왕성함을 잘 다스리는 것이 소서 농부의 몫이다.
소서에 5평 텃밭에서 할 일
들깨·대파 모종 옮겨심기: 하지에 캐고 비운 자리, 잎채소 걷어낸 자리에 들깨와 대파 모종을 옮겨 심는다. 둘 다 장마 습기에 뿌리를 잘 내려 옮겨심기에 알맞은 때이다.
통풍 확보하기: 오이, 토마토, 고추의 웃자란 곁순과 땅에 닿는 아래잎을 솎아낸다. 포기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야 잎이 빨리 마르고 병이 준다. 잘라낸 잎이 병들었으면 밭에 두지 말고 걷어낸다.
병든 잎 걷어내기: 비 그친 뒤 잎을 살핀다. 노랗게 각진 반점(노균병)이나 흰 가루, 무른 자리가 보이면 그 잎만 바로 따낸다. 하나를 두면 순식간에 옆으로 번진다. 초기에 걷어내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콩 순 따기: 콩 잎이 대여섯 장 나면 맨 위 새순을 톡 따준다. 순을 지르면 곁가지가 여럿 뻗어 나와 꼬투리가 훨씬 많이 달린다. 위로만 웃자라는 것을 막고 옆으로 벌어지게 하는 손질이다.
팥류 심기: 적두, 흑두, 재팥 같은 팥류를 심을 때이다. 콩과 작물이라 흙에 질소를 돌려주니, 빈 고랑이나 자투리 자리에 넣어두면 땅도 살린다.
열매채소 웃거름 주기: 오이, 토마토, 고추처럼 여름내 열매를 다는 작물은 이 무렵 기운이 달린다. 포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잘 삭은 거름을 얕게 넣어 뒷심을 보태준다.
고추에 목초액 뿌리기: 빗물이 잎을 타고 흐르며 병을 옮긴다. 비 온 뒤 잎이 마르면 목초액을 잎 뒤까지 골고루 뿌려 소독해 둔다.
28점무당벌레 잡기: 가지와 감자 잎에는 28점무당벌레와 그 애벌레가 붙어 잎을 갉는다. 잎 뒷면을 살펴 알 덩어리째 손으로 잡거나 잎을 잘라낸다.
쓰러진 작물 세우기: 비바람에 지주가 기울고 줄기가 넘어진다. 쓰러진 포기는 일으켜 다시 묶어준다. 줄기가 굵어질 것을 대비해 '8'자로 느슨하게 묶는다.
물길 다시 터주기: 폭우에 고랑이 메워지거나 물길이 막히지 않았는지 점검한다. 낮은 곳에 물이 고이면 뿌리가 숨을 못 쉬어 하루 이틀 만에 물러버린다.
멀칭 보강하기: 빗방울에 씻겨 얇아진 멀칭 위에 마른 풀을 다시 덮는다. 빗방울이 흙을 직접 때리면 흙이 다져지고 흙탕물이 잎에 튀어 병을 옮긴다.
풀 베어 눕히기: 무성해진 풀은 뿌리째 뽑기보다 낫으로 베어 그 자리에 눕힌다. 흙을 덜 다치게 하면서 멀칭재로 쓴다.
비와 습기를 견디는 두 작물 — 오이와 들깨
장마철 텃밭에는 두 부류의 작물이 있다. 습기에 약해 각별히 돌봐야 하는 것과, 습기 속에서도 제 몫을 거뜬히 해내는 것. 오이가 앞이고 들깨가 뒤이다. 소서의 밭에서 이 둘을 나란히 살피면, 장마를 나는 두 가지 지혜가 보인다. 하나는 애써 지키는 법, 하나는 애쓰지 않고도 사는 법.
오이, 물을 좋아하되 젖는 것은 싫어하는 작물
오이는 물을 무척 좋아한다. 몸의 대부분이 물인 작물이니 당연하다. 흙이 마르면 오이가 쓰다. 그래서 여름 내내 물을 넉넉히 주어야 한다. 잘 기른 오이 하나를 갓 따 아삭하게 씹는 맛, 고추와 된장에 조물조물 무쳐 밥상에 올리는 한여름의 그 맛은 텃밭 농부만 아는 즐거움이다. 그런데 여기 오이의 모순이 있다. 물은 좋아하되, 잎이 젖어 있는 것은 몹시 싫어한다. 이 어긋난 성질이 장마철 오이 농사를 가장 어렵게 만든다.
오이가 속한 박과 작물에는 노균병이라는 고약한 병이 있다. 잎에 각진 노란 반점이 생기고, 잎 뒷면에는 회백색 곰팡이 같은 것이 슬며시 낀다. 이 병은 곰팡이가 아니라 물을 좋아하는 다른 종류의 병원체가 일으킨다. 그래서 잎이 젖어 있는 시간이 길고 습도가 높으면 순식간에 번진다. 한 잎에서 시작해 며칠이면 포기 전체로 퍼진다. 장마철 오이밭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이 노균병이다.
이를 막는 예방법은 간단하다. 잎을 빨리 마르게 하는 것. 물은 흙에 주되 잎에는 끼얹지 않는다. 물을 줄 때 잎 위로 뿌리지 말고 뿌리 쪽 흙에 조용히 부어준다. 아래로 처진 잎, 땅에 닿아 흙탕물이 튀는 잎은 미리 따낸다. 포기 사이가 빽빽하면 바람이 안 통하니, 곁순을 솎아 사이를 벌려준다. 오이는 마디마다 열매가 달리므로 원줄기를 곧게 올리고 아래쪽 곁순은 정리하는 편이 관리에 좋다. 약으로 막는 병이 아니라 바람으로 막는 병이다. 그리고 A자형 지주나 그물망을 세워 덩굴을 위로 올려주면, 잎이 땅에서 멀어져 훨씬 빨리 마른다. 오이를 세워 키우는 것은 자리를 아끼려는 이유만이 아니다. 병을 피하려는 이유가 더 크다.
오이에게는 좋은 이웃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옥수수이다. 키 큰 옥수수는 오이 덩굴이 타고 오를 지지대가 되어주고, 여름 땡볕을 적당히 가려 옅은 그늘을 드리운다. 옛 자료에는 옥수수가 오이의 풋마름병을 막아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입하 때 밭 북쪽에 심어둔 옥수수가 있다면, 그 곁이 오이에게 더없이 좋은 자리이다. 오이 포기 밑에 무씨를 두어 알 뿌려두면 뿌리를 파고드는 작은 벌레를 쫓는 데 도움이 된다는 옛 지혜도 있다. 다만 오이는 파속 식물과는 그리 잘 맞지 않으니, 대파나 마늘과는 자리를 떼어 심는 편이 낫다.

들깨, 장마를 오히려 반기는 작물
들깨는 이미 여러 번 나온 작물이다. 입하에는 향으로 해충을 쫓는 고추의 이웃으로, 소만과 하지에는 빈자리를 채우는 작물로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주인공이다. 소서의 눅눅한 밭에서 들깨만큼 든든한 작물이 없기 때문이다.
들깨는 습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마 뒤에 부쩍 자란다. 병충해에도 강하다. 잎과 줄기에서 나는 짙은 향 때문이다. 그 향이 해충의 후각을 흩뜨려 벌레가 잘 꼬이지 않는다. 그래서 들깨는 손이 거의 가지 않는 작물이다. 장마철에 오이를 붙들고 씨름하는 농부에게 들깨는 마음을 놓게 해주는 존재이다. 심어두면 알아서 자란다.
들깨의 이 강한 향은 저 혼자만 편하자고 있는 게 아니다. 이웃한 작물의 해충까지 쫓아준다. 그래서 들깨는 밭 곳곳에 한두 포기씩 흩어 심으면 좋다. 벌레가 잦은 작물 옆에 들깨를 세워두면 천연 방충망 노릇을 한다. 입하 편에서 고추 곁에 들깨를 권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한데 몰아 심기보다 여기저기 나누어 심을 때 그 향이 밭 전체에 고르게 퍼진다.
들깨는 잎을 먹자고 심어도 좋고 가을에 씨앗을 거두자고 심어도 좋다. 여름 내내 깻잎을 따 먹다가, 가을이 오면 씨앗이 여문다. 그 씨앗을 받아두면 이듬해 다시 심을 종자가 된다. 한 번 심어 잎을 먹고, 향으로 이웃을 지키고, 씨앗까지 남기니 5평 텃밭에서 이만큼 품이 적게 드는 효자 작물이 드물다. 다만 들깨는 뿌리를 넓게 뻗고 키도 제법 커서 다른 작물의 햇빛을 가릴 수 있다. 심을 자리를 정할 때는 낮게 자라는 작물의 남쪽을 막지 않도록 방향을 살펴 앉히는 것이 좋다.
오이와 들깨를 나란히 놓고 보면, 장마를 나는 두 가지 태도가 보인다. 오이처럼 애써 돌보아야 견디는 것이 있고, 들깨처럼 제 성질대로 두면 오히려 잘 사는 것이 있다. 손이 많이 가는 작물과 손이 덜 가는 작물을 함께 심어두면, 장마철 바쁜 손도 한결 여유를 얻는다. 어떤 것은 지켜서 살리고, 어떤 것은 믿고 맡긴다. 밭을 가꾸는 일도, 결국 그 둘 사이의 균형이 아닐까.

다음 연재에서는 가장 더운 절기, 대서(大暑)의 텃밭으로 이어진다. 장마가 물러가고 폭염이 몰아치는 한여름 밭에서, 물을 어떻게 다루고 뜨거운 흙을 어떻게 식히는지, 그리고 지친 작물과 농부가 이 더위를 어떻게 함께 건너는지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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