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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업/농사 이야기

[제8화: 소만] 찔레꽃 그늘 아래, 푸르게 부풀어 오르다.

아메바!(김충기) 2026. 5. 18. 14:34

 

소만, 차오르는 계절에 텃밭에서는

산기슭 길가, 사람 손 닿지 않는 빈터마다 하얀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어납니다. 은은한 향기의 찔레꽃, 옛 어른들은 찔레꽃 피는 시절을 '보릿고개'라 불렀습니다. 가을에 거둔 곡식은 진작에 바닥났고, 들판의 보리는 아직 패지 않아 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배고픈 아이들은 산비탈에 올라 찔레순을 꺾어 입에 물었습니다. 갓 올라온 연한 새순은 풋풋하고 달큼해서 잠시나마 허기를 잊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이맘때 재미삼아 꺾어 먹어보돈 찔레순의 맛이 아슴프레 기억이 날 듯합니다.

 

입하의 이팝나무가 흰쌀밥의 풍요 꿈꾸었다면, 소만의 찔레꽃은 그 풍요가 오기 직전, 가장 허기진 시간을 견뎌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만물은 푸르게 부풀어 오르고 있으나, 정작 사람의 곳간은 가장 비어 있던 절기입니다. 그 어긋남의 한가운데에 소만(小滿)이 서 있습니다.

 

절기 이야기: 가득 차되, 아직 익지 않은 시간

소만(小滿)은 24절기 중 여덟 번째 절기로, 양력 5월 21일 무렵에 듭니다. '작을 소(小)'에 '찰 만(滿)'을 씁니다. 풀이하면 '조금씩 가득 차오른다'는 뜻입니다. 햇볕이 점점 두터워지고 만물이 푸르게 부풀어 오르되, 아직 무엇 하나 완전히 익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차오름의 절정이 아니라, 차오름이 시작되는 길목의 절기입니다.

 

옛 기록은 소만을 5일씩 셋으로 나누어 자연의 변화를 새겨두었습니다. 초후(初候)에는 씀바귀가 줄기를 길게 뻗어 오르고, 중후(中候)에는 냉이가 누렇게 시들어 한 해를 마감하며, 말후(末候)에는 보리가 황금빛으로 익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봄을 살았던 풀들이 자리를 비우고, 여름을 살아갈 풀과 곡식이 그 자리를 채워나가는 세대교체의 시간입니다.

 

농사 속담 가운데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낮은 제법 덥지만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여전히 차다는 뜻입니다. 텃밭의 여름 모종이 한낮 햇볕에 잎을 늘어뜨리다가도 새벽녘 찬 바람에 움츠러드는 것이 이 무렵입니다. 특히 작년에 5월중 늦게까지 추위가 있어서 모종들의 냉해피해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만에 보리가 익어야 큰 농사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때 보리가 제대로 여물어주어야 곳간을 채울 수 있고, 다가올 모내기철에도 농사꾼이 든든하게 일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찔레꽃에 얽힌 지혜도 있습니다. "찔레꽃 머리에 천둥 치면 큰 가뭄이 든다"는 말입니다. 찔레꽃이 한창 피는 시기에 천둥번개가 잦으면 그해 여름 가뭄이 깊어진다는 옛사람들의 관측이었습니다. 한 송이 꽃과 한 줄기 바람에서 한 해 농사를 읽어내려 했던 선조들의 눈썰미가 새삼 놀랍습니다.

 

농사 이야기: 돌보는 절기

옛 농가에서 소만은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모판에서 길러낸 어린 모를 무논으로 옮겨 심고, 한편으로는 누렇게 익은 보리를 베어내는 일이 겹칩니다. 한 해 농사의 가장 분주한 길목입니다.

 

도시 텃밭을 일구는 도시 농부에게 소만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무엇을 새로 심는 시기가 아니라, 이미 심어둔 것들을 정성껏 돌보는 시기입니다. 입하 무렵 흙에 뿌리를 내린 토마토와 고추, 가지와 오이의 모종들은 이제 활착(活着)을 마쳤습니다. 새 뿌리를 깊이 뻗고, 새 잎을 부지런히 만들어내며 본격적인 성장기로 들어섭니다. 사람으로 치면 갓난아기가 두 발로 일어서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이때 농부의 손길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한여름 수확량이 크게 달라집니다. 곁순을 부지런히 정리해 주어야 하고, 흔들리지 않도록 지주대에 줄기를 다시 묶어주어야 하며, 흙 표면이 마르지 않도록 멀칭을 보강해 주어야 합니다. 더 심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고, 이미 자리 잡은 것들에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한편 봄 내내 식탁을 풍성하게 채워주던 상추, 쑥갓, 시금치 같은 잎채소들은 슬슬 작별 인사를 준비합니다. 기온이 오르면 꽃대를 올리고 잎이 거칠어지며 쓴맛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를 들깨와 당근, 쥐눈이콩 같은 여름·가을 작물에게 차례로 내어주는 것이 소만 텃밭의 흐름입니다.

 

도시 텃밭의 흙도 이때 변화가 큽니다. 햇볕이 강해지면서 표면이 빠르게 마르고 단단하게 굳어갑니다. 풀들의 기세도 폭발적입니다. 하지만 풀을 무조건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베어낸 풀을 흙 위에 덮어두면 그 자체가 훌륭한 이불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분해되어 흙을 살찌우는 거름이 됩니다.

 

5평 텃밭에서 할 일

소만의 텃밭에서 농부의 손은 '더하기'보다 '다듬기'에 더 많이 쓰입니다. 5평이라는 작은 공간을 알차게 운영하려면, 자리 하나하나가 빈틈없이 일하도록 정성껏 손봐주어야 합니다.

 

1. 봄 잎채소 갈무리와 빈자리 채우기

상추, 쑥갓, 시금치는 꽃대가 올라오기 전 마지막 수확을 마쳐야 합니다. 꽃대가 서면 영양분이 잎에서 꽃으로 빠져나가 잎이 질기고 쓴맛이 강해집니다. 갈무리가 끝난 자리는 흙을 살짝 뒤집어 공기를 통하게 한 뒤, 들깨 모종이나 당근 씨앗으로 바로 이어 심습니다. 5평의 흙은 단 하루도 비워두지 않는 것이 도시 텃밭의 묘미입니다.

2. 여름작물 곁순 본격 정리

토마토는 원줄기 하나만 곧게 키우는 것이 원칙입니다. 잎겨드랑이에서 솟아나는 곁순을 손으로 톡톡 꺾어냅니다. 손가락만 한 크기일 때 정리해 주어야 상처가 작게 아뭅니다. 고추와 가지는 첫 갈래(방아다리) 아래의 잎과 곁순, 꽃까지 모두 훑어줍니다. 식물이 가진 힘을 위쪽 열매로 집중시키기 위해서입니다.

3. 북주기로 뿌리 보호하기

곡우 무렵 심은 감자는 알이 굵어지기 시작합니다. 흙 위로 덩이줄기가 비치면 햇빛을 받아 푸르게 변하고 솔라닌이라는 독성 물질이 생깁니다. 줄기 밑둥으로 흙을 둥글게 모아 올려 덮어주는 북주기가 필요합니다. 옥수수도 키가 무릎 높이에 이르면 뿌리 흔들림을 막기 위해 같은 작업을 해 줍니다.

4. 지주 다시 매기

입하 때 묶어둔 줄기는 어느새 굵어져 끈이 살을 파고들고 있을지 모릅니다. 끈을 풀어 한 칸 위에 다시 묶어 줍니다. '8'자 모양으로 느슨하게 꼬아 매는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5. 멀칭 두툼하게 보강하기

햇볕이 강해지는 만큼 흙의 갈증도 깊어집니다. 베어낸 풀, 마른 낙엽, 볏짚을 작물 주변에 두툼하게 덮어 줍니다. 수분 증발을 막고 풀이 다시 올라오는 것도 늦춰주는, 일석이조의 방법입니다.6. 물주기 리듬 바꾸기

 

기온이 오르면 농부의 마음도 조급해집니다. 매일 조금씩 물을 주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얕고 잦은 물주기는 뿌리를 흙 표면에 머물게 만듭니다. 한낮의 가뭄에 가장 취약한 뿌리입니다. 사흘에 한 번, 아침 일찍, 흙 속 깊이까지 스며들도록 흠뻑 주는 편이 낫습니다. 작물의 뿌리가 물을 찾아 스스로 땅속 깊이 뻗어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잎채소의 바통터치

5평의 흙은 한 해 동안 끊임없이 일합니다. 한 작물이 자리를 비우면 다음 작물이 곧바로 자리를 잇는 흐름입니다. 소만은 그 바통이 봄 잎채소에서 여름 잎채소로 넘어가는 결정적 길목입니다. 봄 식탁을 책임지던 상추가 천천히 무대에서 내려오고, 무더위에도 끄떡없는 들깨가 무대 위로 올라옵니다.

 

상추, 봄의 마지막을 거두며 자리를 비워주는 작물

상추는 본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작물입니다. 낮 기온이 25도를 넘어서면 식물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낍니다. '이대로 가다간 후손을 남기지 못하겠다' 싶어 황급히 꽃대를 밀어 올리는 것입니다. 이 현상을 '추대'라고 합니다. 일단 꽃대가 서면 잎의 영양은 꽃으로 빨려 들어가고 쓴맛이 강해집니다. 더는 식탁에 올릴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소만 무렵부터는 상추를 통째로 뽑아 수확하는 방식보다 큰 잎부터 한 장씩 따 먹는 '솎아 수확'이 유리합니다. 꽃대가 올라오는 포기는 미련 없이 뽑아 자리를 비워 줍니다. 하지만 혹시나 씨를 받기 위해서는 꽃이 피도록 몇 포기를 두고 계속 키웁니다.

 

상추 곁에 두면 좋은 동반 식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파속 식물입니다. 양파, 마늘, 쪽파, 부추가 여기에 듭니다. 잎에서 풍기는 강한 향이 진딧물을 비롯한 해충의 후각을 어지럽혀 상추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 줍니다. 마늘은 가을에 심어 이듬해 여름에 거두는 작물이라 상추가 자라는 봄철 내내 자연스럽게 짝을 이룹니다.

 

뿌리채소도 좋은 짝이 됩니다. 당근과 무가 대표적입니다. 상추는 뿌리가 흙 표면 가까이에 얕게 퍼지는 작물입니다. 반면 당근과 무는 뿌리를 곧게 아래로 뻗습니다. 위와 아래, 얕은 곳과 깊은 곳에서 각자 다른 층의 흙을 일구니 영양분을 두고 다툴 일이 없습니다. 좁은 5평 텃밭의 공간을 위아래로 쪼개 쓰는 방법입니다.

 

해충 피해가 잦은 텃밭이라면 메리골드한련화를 상추 둘레에 함께 심어볼 만합니다. 두 꽃 모두 향과 색으로 해충을 따로 모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진딧물이 상추 잎 대신 한련화 꽃과 잎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추 피해가 줄어듭니다. 꽃이 피어 텃밭의 표정도 환해집니다.

 

들깨, 한여름 잎채소의 든든한 주연

들깨는 도시 텃밭에서 가장 효자 노릇을 하는 작물 중 하나입니다. 병해충에 강하고, 척박한 흙에서도 잘 자라며, 잎과 씨앗까지 두루 쓸 수 있습니다. 게다가 향이 강해 다른 작물 곁에 심으면 해충을 멀리하는 천연 방패막이 되어 줍니다.

 

5평 텃밭에서 들깨를 심을 때는 0.5평만 잡아도 한 가족이 여름내 깻잎을 따 먹기에 넉넉합니다. 잎 수확이 목적이라면 잎들깨용 품종을 골라 4월 중하순에 씨앗을 뿌리거나, 5월 중하순에 모종을 옮겨 심습니다. 들기름까지 욕심을 낸다면 종실용 품종을 따로 골라 5월 하순에서 6월 중순 사이에 파종합니다. 포기 간격은 25~30cm 정도가 적당합니다. 너무 빽빽하면 잎이 작아지고 바람이 통하지 않아 병이 생기기 쉽습니다.

 

들깨의 진짜 가치는 다른 작물의 든든한 이웃이 되어준다는 점입니다. 고추 사이에 한두 포기씩 섞어 심으면 들깨의 강한 향이 담배나방과 진딧물 같은 해충의 접근을 줄여 줍니다. 농촌진흥청과 텃밭 농부들이 오래도록 권해온 조합입니다. 한 줄로 둘러친 들깨 줄기가 향기로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세웠습니다.

 

마늘과의 궁합도 좋습니다. 한자리에서 같은 작물을 거듭 심으면 흙이 지치고 병이 따라붙는 연작피해가 생기는데, 마늘 자리에 들깨를 이어 심으면 이 부담을 한결 덜어 줍니다. 마늘은 보통 가을에 심어 이듬해 6월 중하순에 거두는데, 그 빈자리에 곧바로 들깨 모종을 옮겨 심으면 자리도 시기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들깨를 심을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너무 비옥한 땅에 거름을 가득 넣지 않는 것입니다. 들깨는 척박한 땅도 마다하지 않는 작물이라, 거름이 과하면 잎과 줄기만 무성해지고 향이 옅어집니다. 척박함을 견디는 힘이 들깨의 본성입니다.

 

벌레가 들끓는다고 약을 치면, 벌레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벌레를 먹으러 오는 무당벌레와 풀잠자리도 함께 사라지고, 흙 속의 지렁이와 미생물도 위협받습니다. 도시 한복판 5평의 흙이라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대한 숲과 다르지 않습니다. 식물의 성질을 알아보고 서로 어울려 살도록 자리를 잡아주는 일입니다. 콘크리트 도시 한가운데에서 흙을 만지는 진정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다음 연재에서는 까끄라기 있는 곡식을 거두고 또 심는 절기, 망종(芒種)의 텃밭으로 이어집니다. 5평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한여름 수확을 끊이지 않고 이어가는 '시차 파종'의 지혜와, 본격적인 장마를 맞이하는 흙의 준비법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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