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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추분] 심기에서 수확하기로, 낮에서 밤으로 나누어 지는 날

아메바!(김충기) 2026. 9. 22. 11:50

[제16화: 추분] 심기에서 수확하기로, 낮에서 밤으로 나누어 지는 날

낮과 밤이 똑같아지는 절기, 추분(秋分)이다.

 

절기 이야기: 반으로 나누는 날

추분은 24절기 중 열여섯 번째 절기로, 양력 9월 23일 무렵에 든다. 백로와 한로 사이, 가을의 한가운데 자리다. 한자를 풀면 '가을 추(秋)'에 '나눌 분(分)'. 무엇을 나누는가. 낮과 밤을 나누고 가을 전체를 둘로 나누기도 한다. 이날을 지나면 밤이 낮보다 길어지고, 그 기울기는 동지까지 계속된다.

 

추분은 균형의 날이 아니라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날이다. 조상들은 이 무렵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조선과 고려에서는 추분 새벽에 남쪽 하늘의 노인성(老人星)이 뜨기를 기다리며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장수를 비는 노인성제(老人星祭)를 지냈다. 이 별은 남쪽 지평선 가까이에 잠깐 떴다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보기가 무척 어렵다. 보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여겼다.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첫날에 사람들이 별을 기다렸다는 것, 그 자체가 계절을 읽는 방식이었다.

 

농사 풍속은 훨씬 실용적이다. 추분에는 날씨를 보고 이듬해 농사를 점쳤다. 건조한 바람이 불면 이듬해 풍년이 들고, 날이 지나치게 맑기만 하면 오히려 흉년이 든다고 했다. 언뜻 앞뒤가 안 맞는 말 같지만, 곡식이 여무는 시기에는 알맞게 마르고 알맞게 비가 와야 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된다. 지나침을 경계한 말이다.

 

추분 무렵의 농가는 거두고 말리고 갈무리하는 일로 채워졌다. 목화와 고추를 따서 말리고, 호박고지와 박고지를 썰어 널고, 깻잎과 고구마순을 거두어 묵나물을 마련했다. 곡식을 거두면서 이듬해 심을 씨앗을 골라 바싹 말려 갈무리하는 씨받이도 이때 했다. 씨앗은 날이 화창할 때 받는 것으로 여겼다. 올해는 추분 이틀 뒤가 추석이다. 벌초하고 성묘하고 햇곡식으로 차례를 올리는 그 며칠이 추분과 맞붙어 있다.

 

농사 이야기: 심는 손에서 거두는 손으로

9월 상순까지 배추 모종을 넣고 무 씨앗을 뿌렸다면 이제 김장 씨뿌리기는 끝났다. 지금 새로 씨를 넣어봐야 추위가 오기 전까지 자랄 시간이 모자란다. 추분부터 텃밭의 일은 성격이 바뀐다. 키우고 거두는 일로 넘어간다.

 

키우는 쪽의 중심은 김장 채소다. 배추와 무가 이 무렵부터 몸집을 빠르게 불린다. 특히 배추는 속이 차기 시작하는 결구기에 들어서면서 한 해 중 가장 많은 물과 거름을 요구한다. 결구가 시작될 무렵부터 15일 간격으로 서너 차례 웃거름을 나누어 줄 것을 권한다.  아주심기 뒤 보름쯤마다 잘 삭은 거름을 포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얕게 넣어주면 된다. 한꺼번에 몰아주는 것보다 나누어 주는 편이 낫다. 물도 마찬가지다. 배추는 무게의 90퍼센트 넘게가 물인 작물이라, 결구기에 흙이 마르면 속이 여물지 않고 생리장해가 나타난다.

 

반면 거두기도 시작된다. 고구마가 추분 무렵부터 캘 때가 된다. 땅콩도 뒤를 잇는다. 고구마는 심은 지 120일에서 150일쯤 지나면 알이 다 굵는데, 5월에 순을 꽂았다면 9월 하순이 그 언저리다. 다만 고구마는 서둘러야 할 이유와 기다려야 할 이유를 동시에 갖고 있다. 늦게 캘수록 알이 굵어지지만, 기온이 너무 내려가면 냉해를 입는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숫자가 있다. 고구마는 10도 아래에서 상하기 시작한다. 땅속에 그대로 두어도, 캐서 서늘한 데 두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최저기온이 10도에 가까워지는 시점 전에 거두는 것이 안전하다. 기상청이 9월 하순 발표한 중기예보를 보면 이 기간 전국 아침 기온은 11~20도, 낮 기온은 21~28도로 평년과 비슷한 수준이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중부지방 기준으로 10월 상순에서 중순 사이가 고구마수확의 마감 기한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추분에는 한두 포기를 시험 삼아 캐 보고 알의 크기를 확인한 뒤 전체 수확 날짜를 잡으면 된다.

 

벌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늘해졌다고 방심하기 쉬운데, 배추흰나비 애벌레와 배추좀나방, 벼룩잎벌레는 10월 초까지도 어린 잎을 갉는다. 결구가 시작되고 나면 속으로 파고든 애벌레는 손이 닿지 않는다. 속이 차기 전에 잡아야 한다. 

 

추분에 텃밭에서 할 일

  • 배추 웃거름 주기: 아주심기 뒤 보름 간격으로 잘 삭은 거름을 포기에서 한 뼘쯤 떨어진 곳에 얕게 넣는다. 거름이 잎이나 뿌리에 직접 닿지 않게 한다.
  • 결구기 물 대기: 속이 차기 시작하면 물이 많이 든다. 흙 표면만 적시지 말고 뿌리까지 스미도록 넉넉히 준다. 물은 아침에 준다.
  • 배추·무 잎 뒤집어 벌레 잡기: 배추흰나비 알과 애벌레, 벼룩잎벌레를 잎 뒷면까지 살펴 손으로 훑어낸다. 속이 차기 전이 마지막 기회다.
  • 무 솎기와 북주기: 한 자리에 여러 포기가 섰으면 튼실한 하나만 남긴다. 무 어깨가 땅 위로 올라오면 흙을 긁어 도톰하게 덮어준다. 푸르게 변하고 갈라지는 것을 막는다.
  • 고구마 시험 수확: 한두 포기만 먼저 캐 알의 크기를 본다. 전체 수확 날짜는 그 뒤에 잡는다.
  • 고구마 덩굴 정리: 캐기 며칠 전 덩굴을 낫으로 베어 눕힌다. 잘라낸 줄기는 데쳐 나물로 쓰고, 나머지는 밭에 덮어 멀칭재로 돌린다.
  • 쪽파·대파 북주기: 처서 무렵 심은 쪽파가 자리를 잡았다. 포기 밑동에 흙을 모아주면 흰 대가 길어진다.
  • 여름 작물 걷어내기: 오이·호박 덩굴은 완전히 정리한다. 고추는 끝물까지 두되, 병든 포기는 먼저 뽑아낸다.
  • 들깨·고추 씨앗 받기: 들깨 이삭이 갈색으로 마르기 시작하면 봉지를 씌운다. 잘 여문 고추를 따로 골라 말린다. 마른 날을 골라 받고 이름표를 단다.
  • 마늘·양파 자리 만들기: 다음 절기에 심을 이랑을 미리 준비한다. 완숙 퇴비를 넣고 흙을 안정시켜 둔다. 심기 2주 전 준비가 원칙이다.
  • 낙엽 모으기 시작: 떨어지기 시작한 잎을 한쪽에 쌓아둔다. 겨울 멀칭재이자 이듬해 퇴비 재료가 된다.
  • 서리 오는 날 기록해두기: 최저기온이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날을 표시한다. 고구마와 고추의 마감 기한이 그 숫자에서 정해진다.

 

흙 속에서 채워지는 두 작물 — 배추와 고구마

배추, 안으로 말아 넣는 작물

배추의 결구는 신기한 현상이다. 처음에는 잎이 바깥으로 펼쳐지기만 한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새로 나오는 잎이 바깥으로 벌어지지 않고 안쪽으로 말리기 시작한다. 겉잎은 그대로 밖에 남아 햇빛을 받고, 그 안에서 새 잎들이 겹겹이 포개진다. 우리가 김장할 때 쪼개는 그 노란 속은 햇빛을 거의 못 본 잎들이다. 빛을 못 봤으니 엽록소가 적고, 그래서 노랗고 연하고 달다.

 

겉잎을 함부로 뜯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겉잎은 버리는 잎이 아니라 속을 채우는 공장이다. 벌레 먹었다고 성한 겉잎까지 훑어내면 속이 차지 않는다. 병든 잎만 골라내고 나머지는 그대로 둔다.

 

배추를 묶어주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이 많다. 묶지 않아도 스스로 속이 찬다. 묶는 것은 수확이 늦어져 강한 추위를 맞아야 할 때, 속이 어는 것을 막으려는 방편이다. 일찍 묶으면 오히려 안쪽에 습기가 갇혀 무름병이 생기기 쉽다. 

 

배추의 동반작물로는 갓이 있다. 갓을 밭 가장자리에 둘러 심으면 배추를 지키는 미끼 노릇을 한다고 했는데, 추분 무렵이면 그 말이 눈으로 확인된다. 배추흰나비도 벼룩잎벌레도 갓 잎에 더 몰린다. 갓을 심어둔 밭과 심지 않은 밭은 배추 잎에 난 구멍의 개수가 다르다. 쑥갓도 비슷하게 쓸 수 있다. 국화과 특유의 강한 향이 벌레의 접근을 줄여준다.

 

다만 이어짓기는 피해야 한다. 배추와 무, 갓은 모두 십자화과 한 식구다. 작년에 김장 채소가 섰던 자리에 올해 또 배추를 앉히면 뿌리혹병과 무사마귀병이 도진다. 5평 텃밭에서 해마다 자리를 완전히 바꾸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배추 자리와 무 자리를 서로 맞바꾸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준다. 여름에 콩이 자랐던 자리라면 더 좋다. 콩 뿌리혹박테리아가 남겨둔 질소가 배추에게 그대로 쓰인다.

 

고구마, 척박한 흙에서 더 잘 되는 작물

고구마는 손이 가장 적게 가는 작물이다. 거름을 많이 넣으면 오히려 줄기와 잎만 무성해지고 알이 들지 않는다. 척박한 땅이 고구마에게는 맞는 땅이다. 입하 편에서 고구마를 두고 척박한 땅이 오히려 좋다고 했던 것이 그 뜻이다. 다른 작물을 심기 애매한 자리, 거름기가 빠진 구석에 넣어두면 알아서 자란다. 5평 텃밭에서 이만한 효자가 드물다.

 

캘 때가 되면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먼저 맑고 흙이 마른 날을 고른다. 젖은 흙에서 캔 고구마는 저장 중에 썩는다. 덩굴을 먼저 베어 걷어내고, 포기에서 한 뼘쯤 떨어진 바깥부터 파고 들어간다. 호미 날에 찍힌 고구마는 그 자리부터 무른다.

 

캔 뒤가 더 중요하다. 고구마는 씻지 않는다. 흙이 묻은 채로 바람 잘 통하는 그늘에 펴놓고 열흘에서 보름쯤 둔다. 캔 직후 고구마는 숨을 몰아쉬듯 열을 낸다. 이 열이 빠져야 저장이 된다. 농가에서는 이 시기에 상처를 아물리는 처리를 따로 하는데, 30도 넘는 온도에 습도 90퍼센트 이상을 며칠 유지하는 방식이라 텃밭에서 흉내 내기는 어렵다. 대신 캘 때 상처를 덜 내고, 그늘에서 천천히 말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햇볕에 그대로 두면 껍질이 덴다.

 

보관은 서늘하되 춥지 않은 곳에 한다. 12도에서 15도 사이가 알맞다. 냉장고는 금물이다. 10도 아래로 내려가면 속이 변해 맛이 떨어지고 병에 약해진다. 감자와 정반대다. 감자는 서늘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하지만, 고구마는 서늘하면서도 얼지 않는 미묘한 온도를 원한다.

 

고구마는 이웃을 크게 가리지 않지만, 줄기가 땅 위로 넓게 뻗어 다른 작물을 덮어버린다. 그래서 키 큰 작물과 짝을 짓는 편이 낫다. 옥수수나 수수 아래쪽, 들깨 옆자리가 잘 맞는다. 덩굴이 땅을 덮으면 풀이 올라오지 못하니, 고구마 자체가 살아 있는 멀칭 노릇을 한다. 고구마를 캔 자리는 흙이 부드럽게 풀려 있어 다음 작물에게 좋은 자리가 된다. 마늘이나 양파를 들이기에 알맞다.

 

 

다음 연재는 찬 이슬이 내린다는 절기, 한로(10월 8일경)이다. 마늘과 양파를 심어 겨울을 건너보낼 준비를 하고, 첫서리를 앞두고 남은 작물을 어떻게 갈무리하는지 이야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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