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화: 대서] 가장 더운 날, 불로 불을 다스리다 - 삼복과 함께 건너는 대서
한여름, 뜨거운 국 한 그릇 앞에 앉는다.
푹푹 찌는 날에 무슨 뜨거운 국이냐 싶지만, 옛 조상들은 가장 더운 날 오히려 가장 뜨거운 것을 먹었다. 삼계탕 한 그릇, 그 위로 김이 오른다. 땀을 뻘뻘 흘리며 뜨거운 것을 넘기고 나면 신기하게도 속이 개운하고 더위가 한풀 꺾인다. 열로 열을 다스린다는 이열치열(以熱治熱), 그 오래된 지혜가 빛나는 시절이 바로 지금이다. 대서(大暑), 일 년 중 가장 더운 절기이다. 그리고 이 무렵 텃밭에도 마찬가지로 더위를 피해 숨는 것이 아니라, 더위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때이다.
절기 이야기: 큰 더위, 그리고 삼복
대서(大暑)는 24절기 중 열두 번째 절기로, 양력 7월 23일 무렵에 든다. 한자를 풀면 '큰 대(大)'에 '더울 서(暑)', 말 그대로 '큰 더위'이다. "대서 더위에 염소 뿔도 녹는다"는 옛말이 있다. 무쇠 같은 뿔조차 흐물거릴 만큼 뜨겁다는, 더위를 향한 과장 섞인 엄살이다.
옛 기록은 대서를 5일씩 셋으로 나누어 읽었다. 초후(初候)에는 썩은 풀에서 반딧불이가 날아오르고, 중후(中候)에는 흙이 축축하고 무더워지며, 말후(末候)에는 이따금 큰비가 쏟아진다고 했다. 장마 끝자락의 습기와 한여름 폭염이 뒤섞이는 이 무렵의 공기를, 반딧불이의 불빛과 젖은 흙과 소나기로 읽어낸 것이다.
대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삼복(三伏)이다. 초복, 중복, 말복. 흔히 절기로 알고 있지만 삼복은 24절기가 아니다. 절기 사이에 낀 잡절(雜節), 곧 민간의 세시풍습에 가깝다. 그런데 그 계산법이 절기와 맞물려 있다. 초복은 하지로부터 세 번째 경일(庚日), 중복은 네 번째 경일, 말복은 입추 뒤 첫 경일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삼복은 대체로 소서와 처서 사이, 곧 여름 절기의 한복판에 들어앉는다. 올해만 놓고 보면 초복이 7월 중순, 대서가 7월 23일, 중복이 그 며칠 뒤이다. 대서가 초복과 중복 사이에 딱 끼어 있는 셈이다.
복날의 풍습은 대개 몸을 돌보는 일과 닿아 있다. 삼계탕을 끓이고, 밭에서 갓 딴 옥수수를 삶고, 채소를 넣은 냉국을 말아 먹었다. 뜨거운 것으로 더위에 맞서기도 하고, 시원한 것으로 더위를 식히기도 했다. 어른들은 산그늘 계곡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으로 한나절을 났다. 가장 힘든 때를 그냥 버티는 것이 아니라, 먹고 쉬고 어울리며 건너는 지혜의 방식으로 삼복을 지냈다.
농사 이야기: 장마가 물러간 자리, 폭염이 온다
소서까지 텃밭을 적시던 장마가 대서 무렵이면 슬슬 물러간다. 대신 그 자리를 폭염이 채운다. 하늘이 맑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며칠씩 비가 오지 않으면 흙은 순식간에 말라붙고, 한낮의 뙤약볕에 흙 표면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진다. 소서의 텃밭에서 농부의 손이 습기와 병을 다스리는 데 있었다면, 대서의 손은 더위와 가뭄으로부터 흙과 작물을 지키는 데 있다.
그렇다고 거두는 손이 쉬는 것은 아니다. 대서는 여름 열매작물이 한창 무르익는 때이기도 하다. 입하에 밭 북쪽 끝에 심어둔 옥수수가 이제 통통하게 여물어 하나둘 따 먹을 때가 되었고, 애호박은 하루가 다르게 열려 아침마다 새것을 딸 수 있다. 붉게 익기 시작한 고추도 따 모으기 시작한다. 거두는 손과 지키는 손이 한 밭에서 동시에 움직인다.
이 무렵 가장 중요한 것은 물과 흙의 온도이다. 물은 해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전, 이른 아침에 흠뻑 주는 것이 좋다. 한낮에 주면 금세 증발해 버리고, 뜨거운 흙에 찬물이 닿으면 뿌리가 되레 놀란다. 흙 온도를 낮추는 데는 멀칭만 한 것이 없다. 마른 풀과 베어낸 잡초를 작물 사이에 두툼하게 덮어주면, 뙤약볕이 흙에 직접 닿는 것을 막아 지온이 오르는 것을 늦춘다. 짚 한 줌, 풀 한 아름이 그늘막이 되어 흙 속 지렁이와 미생물의 목숨을 지킨다. 살아있는 흙은 폭염 속에서도 수분을 붙들고 버틴다. 결국 대서의 텃밭에서 농부가 하는 일은, 뜨거운 하늘 아래에서 흙을 살아있게 지켜내는 일이다.
한편으로 대서는 가을 농사를 준비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에 감자와 마늘을 캐고 비운 자리, 잎채소가 물러난 자리에 이제 가을 작물의 씨를 넣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을당근이다. 뿌리가 굵어지려면 서늘한 가을이 필요한 당근은, 지금 씨를 뿌려두어야 가을에 제대로 여문다. 가장 더운 날 가을을 준비한다.
대서에 텃밭에서 할 일
- 옥수수 거두기 시작: 수염이 짙은 갈색으로 마르고, 이삭을 손으로 쥐었을 때 묵직하고 단단하면 딸 때이다. 한낮에 따면 단맛이 빠르게 날아가니, 서늘한 이른 아침에 따서 곧바로 삶는 것이 가장 맛있다.
- 애호박·호박잎 거두기: 애호박은 꽃이 핀 뒤 이레 남짓이면 딴다. 너무 키우면 위쪽에 새로 달리는 열매가 굵지 못하니 적당한 크기에 부지런히 따준다. 연한 호박잎은 쪄서 쌈으로 올리면 여름 밥상의 별미이다.
- 붉은 고추 따기 시작: 붉게 익은 고추부터 골라 딴다. 장마가 지난 뒤라 볕이 좋으니, 딴 고추를 잘 말리면 고춧가루로 갈무리할 수 있다.
- 가을당근 씨뿌리기: 씨를 뿌리기 전 흙을 깊이 부드럽게 풀어준다. 돌이나 흙덩이가 있으면 뿌리가 갈라진다. 씨앗이 잘고 싹이 더디니, 마르지 않도록 뿌린 뒤 얕게 흙을 덮고 짚으로 가려 물기를 지켜준다.
- 아침 물 주기: 해가 뜨겁기 전 이른 아침에 뿌리 쪽 흙으로 흠뻑 준다. 한낮과 저녁 물 주기는 피한다.
- 멀칭 보강하기: 마른 풀, 베어낸 잡초, 걷어낸 작물 줄기를 작물 사이에 두툼하게 덮어 흙 온도를 낮추고 수분 증발을 막는다.
- 열매작물 웃거름 주기: 여름내 열매를 다느라 기운이 달리는 오이·토마토·고추·호박에 잘 삭은 거름을 포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얕게 넣어준다.
- 통풍 살피기: 폭염 속에서도 웃자란 곁순과 땅에 닿는 아래잎은 솎아 바람길을 터준다. 잎이 빽빽하면 병이 든다.
- 쓰러진 작물 세우기: 소나기와 돌풍에 지주가 기울고 줄기가 넘어지기 쉽다. 쓰러진 포기는 다시 세워 '8'자로 느슨하게 묶는다.
- 들깨·콩 살피기: 소서에 순을 지른 들깨와 콩이 옆으로 벌어지며 무성해진다. 그늘이 지나치게 지지 않는지 살펴 다른 작물의 햇빛을 가리면 잎을 솎아준다.
한여름을 함께 나는 세 자매 — 옥수수와 호박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세 자매'라 불러온 밭이 있다. 옥수수와 콩과 호박, 이 셋을 한자리에 어울려 심는 방식이다. 키 큰 옥수수는 콩 덩굴이 타고 오를 기둥이 되어주고, 콩은 흙에 질소를 채워 옥수수와 호박을 먹인다. 그리고 땅을 기는 넓은 호박잎은 흙을 그늘로 덮어 습기를 지키고 잡초를 눌러준다. 세 작물이 서로에게 기대어 한 밭을 이룬다. 지구 반대편의 이 오래된 지혜가, 5평 텃밭에서도 그대로 통한다. 망종 편에서 흙을 살리는 작물로 콩을 심었다면, 그 옆에 옥수수와 호박을 세워 세 자매의 밭을 꾸려볼 만하다.
옥수수, 바람이 맺어주는 작물
옥수수는 심기 쉽고 병도 적어 텃밭 초보에게 든든한 작물이다. 다만 한 가지, 수분(受粉)에는 요령이 있다. 옥수수 꼭대기에 벼이삭처럼 달리는 것이 수꽃이고, 줄기 옆구리에서 나오는 수염 뭉치가 암꽃이다. 수염 한 올 한 올이 알 하나로 이어진다. 그래서 수염에 꽃가루가 고루 묻어야 알이 빠짐없이 들어찬다. 옥수수는 바람이 꽃가루를 날라 수분하는 작물이라, 한 줄로 길게 심기보다 여러 줄을 모아 네모지게 심는 편이 수분에 유리하다. 꽃가루가 이 포기에서 저 포기로 넉넉히 건너가기 때문이다. 알이 듬성듬성 박힌 옥수수는 대개 수분이 제대로 안 된 것이다.
수확할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수염이 짙은 갈색으로 마르면 다 익었다는 신호이다. 확실치 않으면 껍질을 살짝 벗겨 알을 손톱으로 눌러본다. 톡 터지지 않고 손톱자국이 남으면서 살짝 들어가면 딱 알맞은 때이다. 너무 이르면 알이 여물지 않았고, 너무 늦으면 단맛이 빠지고 알이 딱딱해진다. 옥수수는 딴 순간부터 단맛이 달아나기 시작하니, 딸 거면 바로 솥에 넣는 것이 상책이다. 밭에서 따자마자 삶은 옥수수의 그 단맛은, 사서 먹는 것과는 다른 텃밭 농부만의 몫이다.

호박, 아침에 짝을 맺는 작물
호박은 여름 텃밭의 넉넉한 작물이다. 한 포기만 잘 키워도 여름내 애호박이 끊이지 않고, 잎은 쌈으로, 늙은 호박은 가을까지 두고 먹는다. 넓게 뻗는 잎이 흙을 덮어 그늘을 드리우니, 옆에 심긴 작물에게도 시원한 이웃이 된다. 세 자매의 밭에서 호박이 맡은 역할이 바로 이 살아있는 멀칭이다.
호박도 옥수수처럼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수꽃이 훨씬 많이 피는데, 이는 벌을 부지런히 불러들여 몇 안 되는 암꽃까지 확실히 수정시키려는 자연의 셈법이다. 암꽃은 꽃 아래에 작은 애호박 모양의 씨방을 달고 있어 금세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암꽃의 수정 능력은 꽃이 핀 당일 아침, 그것도 이른 시각에 가장 높다. 벌이 잘 찾지 않는 밭이라면, 이른 아침 수꽃을 따 꽃가루를 암꽃 가운데에 살살 묻혀주면 열매가 확실히 달린다. 호박 농사가 아침에 결판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늦잠을 자면 그날의 짝짓기를 놓치는 셈이다.
다만 호박과 오이 같은 박과 작물은 파속 식물과 그리 잘 맞지 않는다. 소서 편에서 오이를 대파·마늘과 떼어 심으라 한 것과 같은 이유이다. 대파나 마늘이 내뿜는 성분이 박과 작물의 기운을 눌러 자람을 더디게 하기 때문이다. 세 자매의 밭을 꾸릴 때는 파속 식물과 자리를 넉넉히 떼어두는 것이 좋다.
옥수수와 호박을 나란히 놓고 보면, 둘 다 제 짝을 맺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재미있다. 옥수수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호박은 벌을 부르거나 사람 손을 빌린다. 방식은 달라도 뜻은 하나다. 혼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 밭의 작물도 사람도, 결국 저 혼자 여무는 법은 없다. 삼복더위에 이웃과 국 한 그릇 나누던 옛조상들처럼, 텃밭의 작물들도 서로에게 기대어 이 뜨거운 여름을 건넌다.

다음 연재에서는 가을이 일어서는 절기, 입추(立秋)의 텃밭으로 이어진다. 폭염이 채 가시지도 않은 밭에서 어떻게 가을 농사의 첫 삽을 뜨는지, 그 뜻밖의 전환을 함께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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