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음식은 타 지역에 비해 맛이 없고, 과하게 짜거나 맵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경상북도 내륙의 경우는 반대로 싱겁고 밍밍하다는 말도 듣지요. 이 지역은 안동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양반문화가 꽃을 피운 곳입니다. 제사상에 놓을 음식이 주가 되다보니 고춧가루나 양념을 많이 넣지 않은 깔끔한 맛이 자리잡게 된 걸로 보입니다.
이런 경상도 음식, 특히 경상북도 안동의 음식에 대한 책이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입니다. 안동의 종가에서 나고 자란 김서령 작가가 쓴 책입니다. 작가는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을 자신의 추억과 곁들여 책 속에 솜씨 좋게 차려냈습니다. 무익지, 난젓, 연변 등 알듯 모를 듯, 익숙한 듯 낯선 음식 이름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등장합니다. 작가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던 고향의 말이라고 하네요.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지만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군침을 삼키게 됩니다.
일단, 제목에서부터 배추적이 나옵니다. 배춧잎에 밀가루를 묻혀 부친 전을 경상도식으로 일컫는 말이라지요. 전은 넣는 재료에 따라서 고기전, 생선전, 호박전 등으로 이름을 붙입니다. 배추적도 이렇게 하자면 배추전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작가는 ‘배추적’이라는 경상도식 이름을 고수합니다. 배추전보다 배추적이라는 이름이 보드랍고 향긋한 배추적처럼 입에 딱 달라붙는 느낌이 납니다.
흔한 음식 이름이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등장합니다. 호박죽을 ‘호박뭉개미’라고 부르고, 북어 보프라기를 ‘명태 보프름’, 흰쌀죽을 ‘갱미죽’으로 부릅니다. 음식은 같은 재료를 가지고 만들더라도 요리법이 조금씩 차이가 나기 마련이지요. 이 이름에서 조리법이나 재료의 특색이 드러나고, 고유한 정서나 감정까지도 전달이 됩니다.
호박뭉개미라는 이름에서 커다란 늙은 호박을 통째로 삶아 뭉개는 넉넉함이 느껴집니다. 명태 보프름은 말린 황태살 보푸라기가 결의 형태가 드러나지 않을 만큼 곱지만 젓가락으로 집힐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섬세함이 엿보이지요. 갱미죽은 몸의 아픈 부분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마음까지 낫게 해 주는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맑고 슴슴하고 아련한 맛
눈으로 읽어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에 만드는 과정과 추억을 고명처럼 얹으니 더 실감이 닙니다. 묵혀서 먹는 된장이 아니라 ‘메주 귀퉁이를 조금 뜯어내 사나흘 삭혀 만드는 햇장’이 있습니다. 햇장은 된장 되기 이전의 어린 장이며, 춘삼월에 파나 달래, 고춧가루를 넣어 먹기 때문에 봄의 맛이 난다고 합니다. 된장의 깊고 콤콤한 맛이 아니라 ‘맑고 슴슴하고 아련한 맛’이라는 햇장의 맛. 이 글을 읽으면, 된장의 ‘옅은 곰팡내가 휘발하면서 나는 산뜻하면서 풋풋한 냄새’가 어느새 코끝에 감도는 것 같습니다.
죽더라도 그 손은 끊어놓고 가게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음식은 작가의 어머니가 만드셨어요. 어머니는 “죽더라도 그 손은 끊어놓고 가게.”라는 격한 말을 들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았다고 합니다. 당시는 1960년대로 안동에서는 옛 모습 그대로 나무를 때서 아궁이에 밥을 했습니다. 음식을 만들 때도 조선 시대에 하던 그대로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기울여야만 제대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인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된장을 만들 때 메주콩을 삶고 발로 밟아 다지는데, 그걸 정갈하게 흰 버선을 신고 밟았다고 해요.
슴슴하고 아무 맛이 없는 배추적을 보내는 건 무엄한 일이었다
안동은 유교문화가 살아있는 곳이라, 안채와 사랑채에 내가는 음식이 달랐다고 합니다. 음식에도 여남의 구별이 있는 셈입니다. 배추적만 해도 사랑채에는 들일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생선전이나 고기전, 하다못해 표고전이나 호박전을 부쳐낼지언정, 슴슴하고 아무 맛이 없는 배추적을 보내는 건 무엄한 일이었던 거죠.
어머니는 국수를 세 종류로 나누어 썰었습니다. 가장 촘촘하게 써는 건 아버지와 사랑손님들의 몫인 건진국수이고, 씹을 것도 없이 목에 후루룩 넘어가는 고운 국수입니다. 그것보다 굵게 써는 건 가족과 일꾼을 위한 것이고, 마지막은 어머니 자신의 몫으로 칼 땀을 고를 필요가 없이 숭덩숭덩 썰어 냅니다. 일 년에 열두 달 내내 제사를 지내고, 층층시하 대가족을 먹이고,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손님을 맞이하는 종부의 삶이 고됩니다. 작가의 어머니는 밤잠을 거의 못 잘 정도였다고 하네요.
▷안동의 국수https://www.andong.go.kr/agritec/contents.do?mId=0302050000
작가는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양반 음식이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땅덩어리 적고 산물이 부족한 안동의 현실을 외면하고, 별 것 아닌 재료로 만든 음식에 양반이니 예의범절이니 하는 것을 내세워 겉으로 번지르르하게 치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던 여성들이 불행하기만 했을까요? 그건 모를 일입니다.
허리 한 번 못 펴고 힘겨운 인생을 살았지만,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신행을 오며 공중에 휘날리는 복사꽃 이파리가 좋아 생에 감사했다고 합니다. 임하라는 동네 이름을 입속에 사탕처럼 굴리니 박하가 들어온 듯 입안이 시원해졌다고 해요. 작가는 어머니나 이웃, 친족 여성들이 ‘허리 한 번 못 펴고 힘겨운 인생을 살았지만,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성들은 사계절을 온전히 느끼며 자연과 가까이 살았습니다. 전통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음식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여성들의 삶을 불행이라는 말 한 마디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교와 가부장제가 공기처럼 그들을 감싸고 있었지만 여성들은 그것을 받아 안고,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제사상에 올라갈 음식과 별도로 여성들만의 음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달디 단 생배추를 우적우적 씹지 못하는 나이든 여성들을 위해 배추적을 부치고, 곶감을 만들고 남은 감 껍질을 말려서 긴 겨울밤의 ‘군입거리’로 삼았지요. 어느 밤에 작은 사랑의 삼촌들이 감 껍질을 찾아 안채로 들어오기까지 했다고 하니, 안채에만 들어간 '무엄한'음식들이 꽤 맛있었던 것은 분명하네요.
문체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맛
안동의 음식이야기와 함께 이 책에서 인상적인 것은 ‘서령체’라고 칭할 정도로 고유성을 인정받는 작가의 문체입다. 작가는 반대의 뜻을 가진 말을 대구로 사용하여 본 말의 뜻을 더 두텁게 표현합니다. 배추적은 ‘깊은 맛’을 가졌는데 깊은 맛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 말과 반대되는 말인 ‘얕은 맛’을 들고 나오지요. 작가에 의하면, 얕은 맛은 혀에서만 달기 때문에 먹고 나면 살짝 민망해지고 죄의식까지 느껴지는 맛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되는 깊은 맛은 어떤 맛일까요? 제 생각에 깊은 맛은 이렇습니다. 단 맛이 바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은은한 단 맛이 입속에 오래 남고, 뱃속도 든든해서 만족감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것까지가 깊은 맛입니다.
배추적에 대한 글에 ‘생속’과 ‘썩은속’이라는 말이 있어요. ‘생속’은 나이가 어리거나 세상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아픔에 대한 내성이 부족한 마음’을 뜻하고, ‘썩은속’은 ‘얼마간 세상을 살며 절로 속이 썩어 내성이 생기면서 의젓해지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작가가 창조해낸 말은 마치 책 속에 등장하는 음식 이름처럼 알듯 모를 듯, 추측이 가능하지만 그보다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이 삶은 나물보다 못할 리 없다
같은 음절의 단어를 되풀이하듯 배치해 이중적으로 의미를 더해주는 문장이 별처럼 빛납니다. ‘삶이 삶은 나물보다 못할 리’ 없다는 말입니다. 시골집 냉동고에서 돌아가신 고모님이 보내주신 꽁꽁 언 나물을 발견하며 작가는 눈물을 흘립니다. 작가의 고모는 종가집에서 태어나서 종가집으로 시집을 왔어요. 혼인 후 사회주의자인 남편이 월북하고, 남편과 낳은 아이는 전염병으로 일찍 죽어 버립니다. 고모는 팔십 평생을 안동에서 시아버지를 모시고 홀로 살았어요. 나물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나물 반찬을 만드는 과정은 만만치 않습니다. 봄철에 나물을 뜯고, 말려서 냉동해두었다가 반찬을 만들 때는 다시 해동해서 물에 불려서 나물을 무칩니다. 나물을 삶은 고모의 삶은 그 나물보다 더 지난했네요. 이제 삶은 나물이 허투루 보이지 않습니다. 고모의 삶 또한 마찬가지고요.
허쁘다
고모의 이야기에서 ‘허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99세까지 살다 가신 시어른에게 아침저녁 빈소에 상식상을 지어 바치는 삼년상이 끝나고, 작가의 고모가 여든이 되었을 때 하신 말입니다. 작가는 이 말이 ‘기쁘다와 슬프다와 고프다와 아프다를 다 녹여 비벼놓은 말’이라고 뜻풀이를 합니다. 이 책에는 이렇게 비슷하거나 상반되는 뜻을 가진 단어들이 연달아 나와서 복합적인 의미를 곱씹게 합니다. 산다는 것이 한 가지 의미로만 설명될 수 없지요.
한 사람이 가고 한 문장이 지다
이 책은 작가의 유고집입니다. 이제 더이상 ‘서령체’를 접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요. 그래도 책은 남아 있습니다. 경북 안동의 옛 음식들에 대해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언어로 듣는 것은 강렬하고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여기 나온 음식을 한 번 먹어 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어요. 작가가 너무 맛깔나게 이야기를 들려준 덕분입니다. 이제 경상도에 먹을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겁니다.
▷‘한 여자가 한 세상’ 작가 김서령, 영원한 자유 얻다…향년 62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64703.html
그리고 일단 배추적 정도는 부쳐 보려고 해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토탈의 배추적 레시피>
1. 배추의 가장 바깥쪽 배춧잎을 떼어낸다. (배춧잎 3장으로로 배추적 1장을 만든다)
배춧잎을 소금에 절여뒀다 찜통에 찐다. (소금에 절이면 밀가루물에 간을 안해도 된다)
2. 밀가루를 물에 개어 요플레 정도의 점도로 밀가루물을 만든다.
3.2에 깨끗히 씻은 배춧잎을 골고루 묻힌다.
4.한숟갈 정도 기름을 팬에 넣어 두르고 3을 넣어 굽는다. 배춧잎 3개를 머리와 꼬리를 교차해서 모양을 만든다.
약불에 굽는다. 센불에 구우면 탄다. 두어번 뒤집어가며 배추를 익히면 완성이다.
5.배추적은 양념간장 맛으로 먹는다. 생배추는 달지만 익힌배추는 슴슴하고 씁쓸한 맛이 난다.
양념간장은 간장에 식초, 매실액, 간마늘, 고춧가루, 깨소금, 들(참)기름을 넣고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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