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 탐방단 10명이 2026년 9월 7일부터 19일까지 독일 베를린과 노르웨이 오슬로의 도시농업 현장 21곳을 다녀왔습니다. 텃밭의 땅은 어떻게 지켜지고, 누가 어떤 돈으로 꾸려 가며, 제도는 그것을 어떻게 뒷받침하는지 질문하고 돌아왔습니다. 베를린의 공유지에 들어선 텃밭과 오슬로의 시립 학교텃밭 농장 등 현장에서 보고 들은 장면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 명의 필자가 프롤로그와 8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도시가 우리의 텃밭이다] 베를린·오슬로 도시농업 탐방기
[프롤로그] 베를린과 오슬로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회 공항 활주로 위에 피어난 자율의 땅 — 템펠호퍼 펠트
2회 주차장, 트램 회차로, 묘지가 마을 거실로 — 베를린의 공동체텃밭들
3회 수확보다 생태와 생존을 배웁니다 — 베를린 텃밭활동학교
4회 감자 파고 밥상 나누는 도심 농장 — 루싸떼르, 야이트뮈라
5회 개인 텃밭에서 협동 농장으로 — 콜로니하게에서 CSA까지
6회 똥·오줌과 하수가 텃밭의 에너지로 — 노르웨이 생명과학대학교
7회 농정이 아닌 환경 행정이 움직인다 — 오슬로와 베를린의 행정
8회 베를린·오슬로가 남긴 질문과 한국 도시농업의 과제
[베를린·오슬로 도시농업 탐방기] 1회 공항 활주로 위에 피어난 자율의 땅 — 템펠호퍼 펠트
방제식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 이사)
끝없이 뻗어 있는 아스팔트 활주로, 지평선처럼 펼쳐진 하늘 아래로 베를린의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2026년 9월 8일 오후,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 탐방단 10명이 마주한 곳은 바로 옛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Flughafen Berlin-Tempelhof) 부지, 지금의 템펠호퍼 펠트(Tempelhofer Feld)였다.
한국에서 도시농업을 일구다 보면 늘 부딪히는 커다란 벽이 있다. 바로 '땅의 불안정성'이다. 애써 일군 자투리 텃밭이 도시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그곳에 깃들었던 주민 공동체와 이웃 간의 관계마저 뿔뿔이 흩어지는 일을 쉽게 겪는다. 그렇기에 베를린 도심 한복판에 여의도보다 더 넓은 비행장 활주로 위에서 시민들이 직접 땅을 지켜내고 그 위에 숲과 텃밭을 피워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비행기가 떠난 자리에 찾아온 자유: 템펠호퍼 펠트 이야기
베를린 남부 템펠호프-쇠네베르크 구와 노이쾰른 구에 걸쳐 있는 템펠호프 공항 부지는 건물을 포함한 전체 면적이 약 386만㎡(약 117만 평)이고, 보전법이 보호하는 들판은 약 303만㎡(약 92만 평)이다. 모나코 공국(약 2㎢)보다 넓은 거대한 허허벌판이다.
템펠호퍼 펠트는 베를린 현대사의 굴곡을 간직한 장소다. 나치 정권 시기 공항 시설이 확장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수산업과 강제노동의 역사도 이곳에 남았다. 냉전기인 1948~1949년 베를린 봉쇄 당시에는 서방 연합군이 서베를린에 식량과 석탄 등 생필품을 공수하는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다.
2008년 10월 30일 마지막 항공기가 이륙하면서 공항 운영은 종료되었다. 이후 2010년 5월, 옛 활주로와 초지를 포함한 공간이 ‘템펠호퍼 펠트’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의 여가와 휴식을 위한 장소로 개방되었다.
시민의 손으로 지켜낸 거대한 하늘과 바람: ‘100% 템펠호퍼 펠트’


공항 문을 닫자마자 시정부는 이 노른자위 땅의 개발을 추진했다. 베를린시는 부지 가장자리에 수천 세대의 주택단지와 상업시설, 공공도서관을 짓는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베를린 시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도시의 빈터를 자율적인 문화·생태 거점으로 전환해 왔던 풀뿌리 시민운동의 유산이 시민들을 움직였다. 시민사회와 단체들은 ‘100% 템펠호퍼 펠트(100% Tempelhofer Feld)’ 운동을 2011년 결성하고 단호하게 목소리를 냈다.
“Freies Feld für ALLE!” (모두를 위한 자유로운 들판!)
“The Feld is not for Sale” (이 들판은 팔 물건이 아니다)
시민들은 부동산 개발 대신 '현재 상태 그대로의 보존'을 담은 법안을 직접 발의했다. 2014년 5월 25일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투표자의 64.3%(739,124표, 투표율 46.1%)가 개발 반대에 표를 던졌고, 같은 해 6월 25일 부지의 인위적 개발과 변경을 제한하는 「템펠호퍼 펠트 보전법(Gesetz zum Erhalt des Tempelhofer Feldes, ThF-Gesetz)」이 공식 발효되었다. 시민의 힘으로 거대한 땅을 통째로 지켜낸 순간이었다.
활주로를 달리고 풀밭에 눕다: 자유와 쉼의 공간
오늘날 템펠호퍼 펠트에는 화려한 조경도, 값비싼 놀이시설도 없다. 옛 활주로와 거친 풀밭이 날것 그대로 숨 쉬고 있다.
- 자유로운 활주로 트랙: 아스팔트 활주로는 롤러스케이트, 자전거, 스케이트보드, 카이트보드를 타는 시민들의 활기찬 놀이터가 되었다.
- 시민 쉼터와 바비큐 존: 시민들은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거나 지정 구역에서 이웃과 함께 바비큐를 즐긴다.
- 야생 생명 보호구역: 광활한 초지 중앙부는 초지 번식 조류와 들풀 번식을 위해 사람의 발길을 제한하는 생태 구역으로 남겨두었다.
- 자생적인 공동체 정원: 공항 동쪽 오더슈트라세 부근에는 상자텃밭 공동체인 알멘데 콘토어(Allmende-Kontor)가, 서쪽에는 다년생 작물과 과수가 어우러진 베스트펠트가르텐(Westfeldgarten)이 자리 잡고 있다.

공유지를 품은 도시, 우리가 마주한 질문들
템펠호퍼 펠트가 공유지로 남아 있는 지금도 베를린 내부에서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베를린의 극심한 주택난과 임대료 상승 속에서 2023년 연립정부(CDU·SPD)가 부지 가장자리의 ‘신중한 개발’ 가능성을 모색하기로 합의했고, 최대 5,000호까지 거론되기 때문이다. 보전법은 하원(Abgeordnetenhaus) 단순 과반으로 개정할 수 있다. 땅을 시민 모두의 공유재로 둘 것인가, 주택 공급이라는 현실적 요구에 내어줄 것인가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다.
땅을 바라보는 철학과 시민 연대의 힘에 대해 탐방에 참여한 최영이 단원은 깊은 성찰을 전했다.
[탐방단 시선] 공유지를 지키는 시민의 힘과 환대
개발 압력이 거센 도심 한복판에서 이 거대한 공항 부지를 끝내 시민의 공유지로 지켜낸 베를린 시민들의 연대와 끈기는 경이로웠다. 투표를 통해 법을 만들고 땅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한 힘은 공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되었다. 텃밭을 일구지 않는 주민들도 자유롭게 찾아와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고 이웃과 식탁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공유지란 단순히 땅을 보전하는 것을 넘어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연결되고 서로를 환대하는 장소임을 실감했다. 공간을 공유재로 바라보는 시민사회의 합의와 운영 체계는 개발 논리에 쉽게 밀려나는 한국 도시농업이 반드시 마주하고 배워야 할 묵직한 숙제다. (최영이)

활주로 위 상자텃밭이 울창한 숲이 되기까지, 알멘데 콘토어
공항 동쪽 오더슈트라세 방면에 위치한 ‘알멘데 콘토어’는 활주로라는 물리적 한계를 창의적으로 돌파한 공간이다. 비행장 바닥인 아스팔트 위에 버려진 목재 팔레트와 포대를 재활용한 ‘이동식 모듈형 상자’ 구조를 고안해 냈다. 이는 토지를 영구 점유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든 해체·이동이 가능한 유연한 도시농업의 기술적 해법이 되었다.
이곳의 운영 방식 또한 독특한 자치 모델을 보여준다. 250여 개의 상자는 개인에게 독점 분양되지 않는다. 2~3명이 함께 관리하는 상자도 있고, 어린이집·난민 지원 단체 등 지역 공동체에 배정하는 상자도 있다. 현지 주민과 이주민, 다양한 세대가 흙을 매개로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문화적 통합을 이뤄낸다. 연회비 12유로에 텃밭 이용료는 소득별로 차등을 두어 30·45·60유로 이상 중 선택하는 방식이다. 금액은 참가자가 자발적으로 선택해 납부하며, 소득을 서류 등으로 증명하게 하지 않는다.
아울러 텃밭 중심부에는 낙엽과 식물 부산물을 체계적으로 발효시키는 다단계 퇴비장과 빗물 저류 시설이 갖춰져 있어, 외부 자원 투입을 최소화하는 도심형 자원순환 인프라 역할을 한다. 매주 열리는 운영위원회에서는 물 사용 규칙부터 공동 구역 정비까지 모든 결정을 직접민주주의 방식으로 합의한다. 알멘데 콘토어는 단순한 녹지 공간을 넘어, 도시 유휴지에서 시민 자치가 어떻게 물리적·사회적 인프라로 안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적인 현장이다.

현장 안내에 따르면 경작지 외에 사람이 심은 나무는 사진 속 보리수 한 그루뿐이다. 15년이 지난 지금 숲을 연상시키는 환경으로 변화한 모습에, 초기 이미지만 보고 온 탐방단은 알멘데 콘토어를 눈앞에 두고도 잠시 찾지 못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를 목격한 김진덕 단원은 도시농업이 나아갈 생태적 그물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탐방단 시선] 공유지를 지키는 힘, 생물다양성의 생태적 그물망
한국 도시농업의 가장 큰 비극은 어렵게 일군 텃밭이 개발 논리에 밀려 너무도 쉽게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베를린 템펠호프의 ‘알멘데 콘토어’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름에도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담겨 있다. 독일어 ‘알멘데(Allmende)’는 전통적으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고 관리하던 공유지를 뜻한다. ‘콘토어(Kontor)’는 사무소나 업무 거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2011년 4월 활주로 옆 황량한 아스팔트 위에 놓인 20개의 작은 상자텃밭으로 출발한 이곳은 15년이 흐른 지금 울창한 숲이 되었다. 상자 틈새로 바람이 실어 온 씨앗이 뿌리를 내렸고, 수많은 수종의 나무와 풀이 어우러지며 새와 야생벌이 살아가는 서식처로 변모했다.
변화의 주체는 인간에 머물지 않았다. 작물을 키우던 임시적인 공간이 비인간 생명들이 머무는 숲으로 확장되면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단단한 생태적 그물망이 엮였다. 공유지를 지키는 힘은 땅을 독점하지 않고 사람과 이웃의 사회적 관계, 풀과 나무, 곤충이 맺는 생태적 관계가 겹겹이 쌓일 때 나온다. 이런 촘촘한 생명의 그물망이야말로 행정과 자본의 개발 압력 앞에서도 공유지를 지속 가능하게 지켜내는 가장 강력한 방패다. (김진덕)

문턱을 낮추고 마음을 여는 텃밭의 미래
템펠호퍼 펠트의 텃밭들이 던지는 또 하나의 화두는 바로 '환대와 개방'이었다. 철조망과 자물쇠로 경계를 세우는 대신, 텃밭 사이사이 벤치를 놓고 누구나 들어와 머물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둔 풍경은 청년 세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유진 단원은 베를린 텃밭이 품은 개방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짚었다.
[탐방단 시선] 베를린에서 찾은 ‘활짝 열린 텃밭’의 비밀
베를린의 텃밭에서는 시민들이 밭 사이사이 놓인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악기를 연주하고, 낮잠을 잔다. 텃밭 구성원이 아닌 그냥 시민들이다. 작물을 훔쳐 가지 않느냐고 묻자 "문제가 없진 않지만, 텃밭을 개방해서 생긴 문제는 아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텃밭에 붙은 안내문은 “CCTV 촬영 중” 대신 “환영합니다, 처음 오셨나요?”로 시작한다. 이어서 텃밭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참여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친절하고 정성스럽게 안내한다. 문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와 참여의 기회도 활짝 열려 있다. 이곳에서는 처음 온 사람도 이방인이 아니다.
시민들을 초대하는 행사도 빠지지 않는다. 문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축제와 워크숍을 열어 시민들과 교류하고, 도시에서 텃밭이 주는 이점을 함께 누린다. 이렇게 텃밭에서 환대받고, 자유롭게 머물고, 언제든 또 와도 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결국 텃밭을 다시 찾는다.
우리 도시의 청년들에게 텃밭은 여전히 낯설고 문턱 높은 곳이다. 구성원이 아니어도 앉아 쉴 수 있고, 처음 와도 환영받고,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떨까? 문과 마음을 활짝 열고 더 많은 청년과 시민이 함께하는 모두의 텃밭을 상상해 본다. (이유진)

퍼머컬처와 먹거리 숲의 새로운 실험: 서쪽의 ‘베스트펠트가르텐’

알멘데 콘토어 반대편 서쪽 템펠호퍼 담(Tempelhofer Damm)과 파라데슈트라세 인근에는 또 다른 실험실인 ‘베스트펠트가르텐(Westfeldgarten)’이 자리하고 있다. 템펠호퍼 펠트 보전법 제정 후 수립된 시민참여형 ‘개발·관리 계획(Entwicklungs- und Pflegeplan, EPP)’ 거버넌스 틀 속에서 탄생한 이곳은 ‘펠트 푸드 포레스트(Feld Food Forest)’ 등 10여 개 시민단체가 결합하여 2022년부터 시작한 ‘먹을 수 있는 숲 정원(Edible Forest Garden, Waldgarten)’ 프로젝트다.
베스트펠트가르텐은 자연 생태계의 물질 순환을 모방하는 ‘퍼머컬처(Permaculture, 영속농업)’ 원리를 기반으로 한다. 매년 밭을 갈아엎는 일년생 작물 대신 과수, 베리류 관목, 질소고정 식물, 지표 덮개 식물, 다년생 허브를 층층이 심어 스스로 순환하는 자립형 비오톱을 구축하고 있다. 정원 한가운데는 나선형으로 돌과 흙을 쌓아 다양한 미기후를 형성하는 ‘허브 스파이럴(Kräuterschnecke)’이 서 있다. 매달 첫째 주 목요일 ‘도너스탁스트레프(목요 모임)’에는 시민들이 음료를 들고 모여 함께 돌을 쌓고 기후위기 대응과 도시 먹거리 자급의 미래를 토론한다.
이곳에서 ‘공간’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만약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 5,000㎡의 공간이 사진처럼 15년간 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방치된 땅, 혹은 놀고 있는 땅을 개발하자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을까? 베스트펠트가르텐은 완공 목표가 없다. 시작할 때도,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평선 끝에서 마주한 우리의 미래
활주로 위에 서서 바라본 템펠호퍼 펠트는 국가나 지자체가 일방적으로 시혜하듯 조성해 준 정형화된 공원이 아니었다.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지켜냈고, 흙과 상자를 날라 터를 잡았으며, 자연의 바람과 풀잎이 시간을 들여 완성해 가고 있는 ‘진정한 자율의 땅’이었다.
콘크리트 틈새를 뚫고 숲을 이룬 텃밭처럼, 우리의 도시농업도 이제 단순히 채소를 생산하고 수확하는 취미를 넘어 도시의 공유지를 지키고 기후위기에 맞서는 생태적 연대의 거점으로 단단해져야 하지 않을까? 템펠호퍼 펠트의 바람이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열 명의 도시농부에게 던진 첫 번째 화두였다.
추가자료
[탐방기관별 종합보고서]
* 알멘데 콘토어와 베스트펠트 가르텐의 자료조사와 현장방문으로 얻은 정보와 탐방단의 목소리를 담은 종합보고서를 더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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