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기 이야기: 가을은 말복보다 먼저 온다
입추(立秋)는 24절기 중 열세 번째 절기로, 양력 8월 7일이나 8일 무렵에 든다. '설 입(立)'에 '가을 추(秋)', 말 그대로 가을이 일어서는 때이다. 대서와 처서 사이에 들며, 동양의 역법에서는 이날부터 입동 전까지 석 달을 가을로 친다. 음력 7월을 맹추(孟秋), 곧 초가을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까닭이다.
지난 대서 편에서 삼복이 절기가 아니라 잡절이라는 이야기를 다. 그 삼복의 마지막인 말복은 입추가 지난 뒤 첫 경일(庚日)에 든다. 그러니까 말복은 언제나 입추 뒤에 온다. 올해로 치면 입추가 8월 7일, 말복이 8월 14일이다. 게다가 올해는 중복과 말복 사이가 스무 날이나 벌어진 월복(越伏)의 해이다. 더위가 그만큼 길게 늘어진다는 뜻이다. 가을이 먼저 서고, 그다음에 마지막 더위가 온다. 계절의 이름과 몸이 느끼는 온도가 이렇게 엇갈리는 절기가 또 없다.
입추를 둘러싼 옛말은 대개 벼와 관련이 있다. "입추 때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는 말이 있다. 장마가 걷히고 볕이 길어지니 벼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자란다. 그 소리에 개가 놀라 짖는다는 유쾌한 과장법이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말도 이 무렵에서 나왔다. 김매기가 끝나고 논매기도 마무리되어, 어정어정 건들건들 지내도 되는 한때가 농촌에 찾아온다는 뜻이다. 일 년 중 농부가 숨을 돌리는 드문 시절이었다.
다만 마음까지 놓을 수는 없었다. 벼가 한창 여무는 때라 이 무렵의 비는 반갑지 않았다. 비가 닷새 넘게 이어지면 조정과 고을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 비를 멎게 해달라고 하늘에 비는 제사이다. 지난 하지 편에서 살펴본 기우제와 정확히 반대인 의례이다. 자연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늘 이렇게 조심스럽게 청하는 것뿐이었다.
폭염 속에서 겨울을 준비하다
옛 농가의 입추는 두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참깨를 베고 옥수수를 거두며 여름 농사를 마무리하는 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비운 밭에 김장용 무와 배추를 들이는 때였다. 거두는 손과 심는 손이 다시 한번 같은 밭에서 만난다.
도시 텃밭에도 어정칠월은 없다. 텃밭밭은 지금이 가장 분주하다. 여름 열매채소가 아직 열매를 달고 있는데, 그 사이사이로 가을 작물이 들어와야 한다. 옥수수는 마지막 이삭을 내주고 대를 눕히고, 고추는 붉게 익은 것부터 따내야 하고, 대서에 뿌린 가을당근은 떡잎을 밀어 올려 솎아달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추 씨앗을 넣어야 한다.
이 폭염에 배추라니 생각이 들 것이다. 배추가 잘 자라는 온도는 섭씨 18도에서 20도 사이이다. 지금 기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지금 씨를 넣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배추는 잎이 속으로 겹겹이 말려드는 결구(結球) 작물이다. 속이 차오르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확보하려면 서늘해지기를 기다려서는 늦는다. 씨를 넣어 모종을 기르는 데 스무 날 남짓, 밭에 옮겨 심고 속이 차기까지 두 달 남짓. 김장철에서 거꾸로 헤아려 오면 결국 지금 이 뜨거운 날에 손이 닿는다.
다만, 최근 몇년간 여름더위가 길어지면서 어린배추가 더위를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흔해지고 있다. 기후위기 속에서 배추농사가 점점어려워지고 있어서 배추농사를 포기하는 텃밭들도 있다. 파종시기를 한절기 정도 늦추거나 하는 방법과 함께, 배추 결구를 조금은 포기하면 오히려 농사가 수월해질 수도 있다.
한 가지 더 유념할 것은 이 무렵부터 태풍이 잦은 시기라는 것이다. 여름내 키를 키운 작물일수록 바람에 약하다. 지주가 헐거워진 곳은 없는지, 물이 빠질 길은 열려 있는지 미리 살펴야 한다.
입추에 텃밭에서 할 일
- 김장배추 씨뿌리기: 중부 지방 기준 8월 상순에서 중순이 적기이다. 모종판(트레이)에 상토를 채우고 한 칸에 두세 알씩 넣은 뒤 얕게 덮는다. 씨앗이 작아 물에 떠내려가기 쉬우니 흙을 덮은 뒤 물은 조용히 준다. 스무 날에서 스물닷새쯤 길러 본잎 서너 장이 나면 밭에 옮겨 심는다.
- 모종판 그늘 관리: 육묘 기간이 한여름과 겹친다. 한낮 뙤약볕에 그대로 두면 상토가 말라 싹이 고르지 않다. 반그늘에 두거나 한랭사를 씌워 온도를 낮추고, 상토가 마르지 않게 자주 살핀다. 바람은 통하게 두어야 웃자라지 않는다.
- 무·쪽파 심을 자리 만들기: 무는 뿌리를 곧게 내려야 하니 흙을 깊이 부드럽게 풀어준다. 잘 삭은 거름은 심기 두 주 전쯤 미리 넣어두는 것이 좋다. 덜 삭은 거름이 뿌리에 닿으면 갈라지거나 기형이 된다.
- 씨쪽파 다듬기: 하지 무렵 캐어 그늘에 갈무리해 둔 씨쪽파를 꺼낸다. 마른 껍질과 묵은 잎을 벗기고, 알이 굵은 것은 하나씩, 잔 것은 두세 알씩 쪼개어 나눈다. 심기는 8월 중순부터가 알맞다.
- 옥수수 마무리와 대 정리: 남은 이삭을 거두고 나면 옥수숫대를 잘라 밭에 눕힌다. 굵은 대는 그대로 두었다가 늦콩이나 덩굴 작물의 지지대로 써도 좋다.
- 붉은 고추 따서 말리기: 붉게 익은 것부터 순서대로 딴다. 그늘에서 바람에 말리면 색이 곱게 남는다. 계속 열매를 달아야 하니 포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잘 삭은 거름을 얕게 넣어 뒷심을 보탠다.
- 가을당근 솎기: 대서에 뿌린 당근이 본잎을 두세 장 냈다면 포기 사이가 5~6cm가 되도록 한 번 솎는다. 솎아낸 잎은 버리지 말고 샐러드에 넣는다.
- 늦콩·팥 살피기와 노린재 잡기: 꼬투리가 맺히기 시작하면 노린재가 찾아든다. 이슬이 맺힌 이른 아침, 움직임이 둔할 때 손이나 페트병으로 잡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 태풍 대비 점검: 지주가 흔들리는 곳은 다시 박고, 줄은 '8'자로 느슨하게 다시 묶는다. 고랑에 물이 빠질 길을 터두고, 키 큰 작물은 윗줄을 한 단 더 매어 올린다.
- 가을 잎채소 다시 뿌리기: 여름 작물을 걷어낸 자리에 열무, 얼갈이배추, 가을상추 씨앗을 흩어 뿌린다. 한 달이면 밥상에 오른다.
- 아침 물 주기와 멀칭 보강: 늦더위가 남아 있다. 물은 해가 뜨겁기 전 이른 아침에 흠뻑 준다. 얇아진 멀칭 위에는 마른 풀을 다시 덮어 흙을 식힌다.
- 여름 작물 걷어낸 자리 살리기: 다 자란 포기는 뿌리째 뽑기보다 밑동을 잘라 뿌리를 흙에 남긴다. 남은 뿌리가 썩으면서 흙에 공기 길이 되고 미생물의 먹이가 된다.
겨울을 준비하는 두 작물 — 배추와 쪽파
김장은 한 해 농사의 마지막 살림이지만, 그 준비는 가장 더운 날 시작된다. 배추와 쪽파. 하나는 씨앗부터 모종을 길러 들이는 작물이고, 하나는 작년의 제 몸을 쪼개어 다시 심는 작물이다. 시작하는 방식은 이렇게 다른데, 두 작물이 만나는 자리는 결국 같다. 겨울의 김치 항아리이다.
배추, 시간과 겨루는 작물
배추 농사는 시간과의 겨루는 작물이다. 너무 일찍 심으면 늦더위에 시달려 무름병이 오고, 너무 늦게 심으면 속이 차기 전에 추위가 닥친다. 그 좁은 틈을 맞추는 일이 배추 농사의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중부 지방에서는 8월 상순에서 중순에 씨를 넣고, 8월 하순에서 9월 상순에 밭으로 옮긴다.
씨앗을 밭에 바로 뿌리지 않고 모종판에 기르는 데에도 까닭이 있다. 어린 배추 잎은 벌레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이다. 벼룩잎벌레는 어린 잎에 좁쌀 같은 구멍을 촘촘히 뚫고, 배추좀나방과 진딧물도 이 시기에 달려든다. 손바닥만 한 모종판에 모아두면 살피기가 훨씬 수월하다. 한랭사나 고운 그물을 씌워두면 벌레의 접근 자체를 막을 수 있다. 밭에서는 벌레를 쫓아야 하지만, 모종판에서는 아예 만나지 않게 할 수 있다.
옮겨 심기 이삼일 전에 모종판의 자리를 한 번 옮겨주는 요령도 있다. 구멍 밖으로 나온 뿌리 끝이 끊어지면서 잔뿌리가 새로 돋고, 그 덕에 밭에 옮겼을 때 뿌리내림이 빠르다. 옮겨 심는 날은 흐린 날 오후를 고른다. 뙤약볕에 심으면 시들어 몸살을 앓는다.
배추 곁에 둘 이웃도 지금부터 생각해 둘 만하다. 농촌진흥청 자료에 따르면 고추밭에 배추를 섞어 심으면 배추흰나비를 막아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입하에 심어 아직 밭을 지키고 있는 고추, 그 곁이 배추 모종에게는 나쁘지 않은 자리인 셈이다. 메리골드를 배추 이랑 가장자리에 두르는 것도 오래 권해온 방법이다. 유기농업 연구에서는 바질과 레몬밤의 향이 벼룩잎벌레를 기피하게 한다는 결과도 나왔다. 반대로 겨자채나 갓처럼 벌레가 더 좋아하는 십자화과 작물을 밭 가장자리에 한 줄 심어 벌레를 그쪽으로 불러 모으는 방법도 있다. 쫓는 식물과 부르는 식물을 함께 쓰는 것이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돌려짓기이다. 배추는 같은 자리에 이어 심으면 뿌리혹병과 무름병이 도진다. 그런데 무, 갓, 열무, 순무가 모두 배추와 한 식구(십자화과)이다. 작년에 무를 심은 자리도 배추에게는 이어짓기나 마찬가지이다. 작은 텃밭 안에서 자리를 돌리기가 쉽지는 않지만, 최소한 지난가을 김장 채소가 자랐던 자리는 피해주는 것이 좋다. 감자를 캔 자리에 토마토를 들이지 말라던 이야기와 같은 이치이다.
쪽파, 제 몸을 쪼개어 이어지는 작물
쪽파는 씨앗으로 심지 않는다. 지난해 밭에서 자란 쪽파의 알뿌리, 곧 씨쪽파를 심는다. 하지 즈음에 시들해진 쪽파를 캐어 그늘에 말려 갈무리해 두었다면, 그 알뿌리가 이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차례이다. 한 포기가 여러 쪽으로 갈라지고, 그 쪽들이 다시 각각 한 포기가 된다. 심고 거두는 일이 아니라, 나누고 이어지는 일에 가깝다. 이름에 붙은 '쪽'이라는 말이 그 성질을 그대로 담고 있다.
심는 요령은 어렵지 않다. 알이 단단하고 윤기 있는 것을 고른다. 굵은 것은 하나씩, 잔 것은 두세 알씩 붙여 심는다. 심기 전에 알뿌리 위쪽을 3분의 1쯤 잘라주면 싹이 고르게 올라온다. 뿌리 쪽이 아래로 가도록 세워 5cm 깊이로 묻고, 줄 사이는 20cm, 포기 사이는 10cm쯤 둔다. 심기 전에 흙을 흠뻑 적셔두면 뿌리내림이 좋다. 심고 40일 쯤 지나면 첫 수확이 시작되어, 굵은 포기부터 서너 차례에 걸쳐 거둘 수 있다.
쪽파는 산성 흙을 싫어한다. 오래 묵은 텃밭 흙은 대개 산성으로 기울어 있으니, 심기 전에 미리 흙을 손봐두는 것이 좋다. 거름은 넉넉히 필요하지만 한꺼번에 몰아주는 것보다 자라는 동안 나누어 주는 편이 잎을 부드럽게 한다.
쪽파를 어디에 심을 것인가. 콩 곁에 파를 심지 말라고 했고, 마늘과 콩을 떼어 심으라고 했다. 파속 식물이 내뿜는 항균 물질이 콩 뿌리혹박테리아의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밭에서 두 번이나 밀려난 셈이다. 그런데 이 파속 식물을 반기는 이웃이 있다. 당근이다. 농촌진흥청 연구에도 당근과 파속 작물의 섞어짓기가 좋은 조합이라고 한다.
밭에서 작물의 자리를 정하는 일은 결국 관계를 읽는 일이다. 어떤 작물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지 않다. 콩 곁에서 방해가 되던 것이 당근 곁에서는 도움이 된다. 5평이라는 좁은 땅에서 이 관계를 하나씩 익혀가는 것, 그것이 약을 치지 않고도 밭을 건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연은 한 번도 홀로 자란 적이 없다.

다음 연재에서는 더위가 물러앉는다는 절기, 처서(處暑)의 텃밭으로 이어진다.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그 무렵, 밭에서는 김장무 씨앗을 넣고 길러둔 배추 모종을 옮겨 심는다. 여름이 물러난 자리에 가을이 어떻게 들어서는지를 함께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