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인공지능 시대, 왜 다시 ‘학교 텃밭’인가? : 정용주 교장선생님 강의를 듣고
안녕하세요. 오늘도 학교 텃밭의 낮은 자리에서 아이들과 함께 흙을 만지며, 생명의 경이로움을 일깨우는 길 위에 계신 강사와 활동가 여러분께 깊은 존경의 인사를 건넵니다.
최근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에서 진행된 천왕초등학교 정용주 교장선생님의 '텃밭과 함께하는 교육의 생태전환' 강의를 들었습니다. 모든 감각과 관계가 매끄러운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공지능 시대, 왜 우리는 굳이 거칠고 투박한 흙 앞에 다시 서야 하는 걸까요? 손끝에 닿는 흙의 서늘한 질감과 생명의 박동을 그리워하며, 그날의 깊은 통찰과 위로를 담아 전해 드립니다.

연결이 끊어진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접촉’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기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일상은 유튜브와 틱톡의 1.5배속 리듬에 맞춰져 있고, 모든 관계와 사물은 화면 안의 추상적인 데이터로 증발해 버렸습니다.
정용주 교장선생님은 이를 ‘구체적인 사물과의 접촉이 사라진 시대’라고 진단합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흙의 습기, 뿌리의 끈질긴 저항, 계절을 머금은 바람의 냄새를 잃어버린 자리에 타자에 대한 무감각과 폭력성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화면을 넘기듯 싫은 존재를 쉽게 지워버리는 세상에서, 아이들의 사회 정서적 위기는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텃밭 교육은 바로 이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아이들이 구체적인 생명체와 뜨겁게 '접촉'하며 생태적 감수성을 되찾는 소중한 통로가 됩니다.
생태전환의 관점: 도시의 ‘게릴라’가 된다는 것
인류 문명은 농업 혁명 이후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인간 아닌 것'들을 배제하고 제거하며 성장해 왔습니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강화된 현대 도시는 자본과 성과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반생태적인 구조의 결정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도시농업은 단순히 작물을 키우는 취미 활동이 아니라, 도시를 '재자연화(Rewild)'하는 저항적 실천입니다.
• 대사 순환의 회복: 시멘트로 덮여 숨통이 끊어진 도시의 틈새를 열어 탄소, 에너지, 물, 토양이 순환하는 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 생물 다양성 보존: 도시가 점령하지 못한 작은 빈터에 벌레와 새들이 깃들게 하고, 인간 중심의 문명이 놓쳐버린 생태적 연대감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 삭막한 콘크리트 숲에서 생명의 힘을 믿고 나아가는 '도시의 게릴라'와도 같습니다.
텃밭 교육의 5가지 핵심 가치: 질문 속에 머무는 법
강의에서 제시된 텃밭 교육의 다섯 가지 키워드(감각, 시간, 관계, 장소, 기록)는 우리가 현장에서 붙잡아야 할 이정표입니다.
- 감각(Senses): 흙을 만지는 손은 ‘생각하는 바닥’을 만듭니다. 흙의 눅진한 냄새와 손톱 사이에 끼는 흙의 무게감은 추상적인 지식이 줄 수 없는 생생한 배움의 기초가 됩니다.
- 시간(Time): 유튜브 1.5배속 시대에 농사는 결코 속도를 낼 수 없습니다. 씨앗이 싹을 틔울 때까지 아이들은 '질문 안에 오래 머무는 능력'을 배웁니다. 24절기의 느린 리듬을 따르며,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생명의 신비를 버텨내는 힘을 기릅니다.
- 관계(Relationship): 인간끼리의 관계를 넘어 흙 속의 균류, 지렁이, 변덕스러운 날씨 등 비인간 존재들과의 얽힘을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시스템 사고'를 몸으로 익힙니다.
- 장소(Place): 학교의 빈 땅을 공동체의 거점으로 바꾸는 활동입니다. 계절에 따른 ‘장소의 리듬’을 반복하며, 소외되었던 공간을 생동감 넘치는 만남의 장으로 재탄생시킵니다.
- 기록(Record): 관찰을 통한 성찰을 기록하며 아이들은 자신의 성장을 확인합니다. 이는 단순히 정보를 적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에 대한 예우이자 삶의 일기입니다.
반공모(Anti-complicity)적 교수법: 시스템에 저항하는 교육
우리는 흔히 '키트(Kit)'를 활용한 일회성 체험이나 효율적인 작물 재배에 머물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생태전환은 경쟁과 효율만을 강조하는 기존 학교 시스템에 공모하지 않는 '반공모적 교수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비인간 의회(Non-human Assembly): 강의 속 '죽은 나무'의 사례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아이들은 "죽은 나무가 정말 죽은 것일까? 이 나무는 다른 곤충들의 집이 되어주고 있으니 살아있는 게 아닐까?"라는 토론을 통해 비인간 존재의 권리를 고민합니다. 지렁이가 안전하게 이동할 통로를 만드는 법을 논의하며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선 민주주의를 연습합니다.
• 기후 정의의 관점: 기술과 자본으로 해결하려는 '기후 과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사회적 불평등과 탈성장의 가치를 고민하는 '기후 정의'와 '생태 정의'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 실천 가이드:
- 단편적 수업을 넘어 교과를 통합하고 주제를 융합하는 설계가 필요합니다.
- 박정희식 경제 성장 담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생태적 민주주의의 역사를 조명해야 합니다.
- 학교 담장을 넘어 지역 공동체와 연대하여 마을의 자원을 학교 교육 과정 안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맺으며: 버티는 힘이 세상을 바꿉니다
자본과 효율이 지배하는 이 거대한 반생태적 흐름 속에서 텃밭을 일구는 일은 때로 외롭고 고된 싸움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용주 교장선생님은 우리에게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승리하는 것보다 버티는 것이 중요합니다." 효율을 따지지 않고 흙을 지키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이 문명에 대한 가장 강력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을 바라보는 인간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체적인 사물과 접촉하고 생명의 리듬을 온몸으로 기다리는 텃밭 교육은, 사라져가는 우리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현장에서 고군분투하시는 여러분의 실천이 아이들의 삶에 생태적인 뿌리를 내리는 귀한 밑거름이 되기를 온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강의 영상 보기] 정용주 교장선생님의 더 깊고 뜨거운 통찰이 담긴 강의 전체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울림 있는 기록이 여러분의 활동에 든든한 동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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