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조이(석지영)
지난 2024년 9월 26일, 고양도시농업네트워크의 벽제농장과 자유농장에 다녀온 후기를 올립니다.
추석이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뜨거운 날, 인천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고양도시농업네트워크(이하 고도넷)의 ‘벽제농장’을 방문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이 세번째 지역 탐방이라 다른 도시 텃밭이 어떤 모습인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다. 외연은 비슷하지만 각기 걸어온 길과 고민이 다른 텃밭 베테랑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기대된다.
도시농업의 역사, 벽제농장
벽제농장은 고양시와 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개명산 자락 아래 수녀골에 위치해 있다. 한때 60여명의 여성 기독교인이 수도자의 삶을 지향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 ‘수녀골’이라 불리기 시작했으나 지금은 연로하신 세 분만 살고 있다. 그 공동체가 남원에 본원을 둔 ‘동광원’의 분원이고, 벽제농장은 수도자들이 일구던 땅에 자리잡아 농사를 이어가고 있다.
벽제농장 입구 계곡
임도와 텃밭의 경계를 따라 세찬 물줄기가 시원하게 흐른다. 개명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작은 계곡을 이뤄 몸을 담궈도 될만큼 깨끗하고 시원해 보인다. 텃밭에서 물만큼 귀한게 있을까. 벽제농장이 도시농업의 원류 역할을 한 것이 우연이 아닌 듯 하다.
입구에서 우리를 맞아주신 고도넷 안병덕 공동대표님
고도넷 안병덕 공동대표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텃밭 입구에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벽제농장 곳곳을 소개하며 지난 15년 가까이 고도넷을 이끌어온 얘기를 나누었다. 산 아래에 자리해서인지 곳곳에 무성히 자란 잡초며 식생이 보통 밭보다 훨씬 풍부한 인상이다. 낮은 경사면을 따라 밭이 층을 이루고 있어 위쪽에서 내려다 보면 텃밭 전경 전체가 보인다.
개명산 아래에 위치한 벽제농장. 왼쪽이 노숙인을 위한 치유텃밭이다.
입구 안쪽에서 오르면 산 바로 아래에 노숙인이 일구는 텃밭이 있다. 서울역 노숙자를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는 목사님이 노숙인 몇 분을 모시고 가끔 오는 곳이다. 그분들께 자리를 내어주는 텃밭이 전국에 몇이나 있을까? 넉넉하게 내어 주신 마음에 감동했다. 노숙인들이 땀흘리며 일하는 기쁨에 다시 살아갈 희망을 품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것을 나중에 듣게 됐다. 농사 또한 규칙이나 제약이 있어 노숙인들에게는 적응이 어려울 수 있다고 한다. ‘치유농업’이 대세다. 어떤 교육 프로그램이든 대상자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흙과 생명을 다루는 것이 누구에게나 유익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낙관적 기대보다는 면밀한 디자인이 필요함을 다시 생각했다.
밭 한켠에 벼가 익어가고 있다. 60년대 초 자급자족하던 동강원 공동체의 주식이었던 밭벼가 이제는 심을 필요가 없게 됐다. 그 종자 만큼은 이어가자는 생각으로 처음 텃밭 활동을 하는 시작하는 분들에게는 반드시 밭벼를 심도록 권하고 있다. 농부에게 벼의 의미는 각별한 것 같다. 생명을 이어가는 마음, 쌀이 가진 의미가 이곳에서 활동하는 고도넷 회원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벽제농장 전경
벽제농장은 텃밭회원 구역, 안대표님 경작 구역, 동강원에서 짓는 구역으로 크게 나뉜다. 많을 때는 30~40 가구가 텃밭을 분양받기도 했다.
고도넷(고양도시농업네트워크) 도시농부학교 1기가 모여 지은 원두막이 있다. 최근에 지붕만 새로 했다. 안병덕 대표 역시 도시농부학교 1기 출신이다. 2011년에 광명텃밭보급소 등 기존의 네트워크가 고도넷을 만들기로 결의를 한 지 한달만에 조례를 만들고 운영을 시작했다. 다음해 전국 최초의 '도시농업전문인력양성기관'으로 지정을 받아 도시농업전문가를 배출했고 현재는 어린이농부학교, 도시원예아카데미 등 교육 활동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안정적인 교육 활동의 기반에는 벽제농장을 비롯해서 우보농장, 찬우물농장, 노루뫼농장, 자유농장 등 민간 주도의 농장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한다.
“텃밭에서는 5분만 먼저 와도 선생이다.”
도시농업의 산실로서, 단체를 만들고 교육 활동을 시작하는데 언제나 용기가 되었던 말이다.
농부학교나 전문가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콩공동체, 감자공동체, 마늘공동체 등 작물의 생육 시기에 따라 작물 공동체가 조직되어, 모여서 계획하고 농사짓고 나누는 활동을 한다. 토종 모종을 키워 나누는 ‘보존회’ 활동과 어린이 소모임 활동도 진행되고 있다.
텃밭 공동체에 있어 수확물 나눔은 중요한 이슈다. 나누는 기준을 두고 논쟁이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결국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눈다’는 결론으로 갔다고 한다. 앞으로는 미래 세대를 위한 나눔을 고민해야 한다는 속깊은 말씀을 덧붙이셨다. 단체 차원에서도 젊은 세대가 필요하지만 최소한의 활동을 할 여건을 만들어 줄 수 없으니 활동을 권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도시농업에 청년 유입이 어려운 점은 도시농업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농업의 공통된 현실이다.
마을학교를 꿈꾸는 자유농장
벽제농장에서 40분 가량 이동하여 흥도동에 위치한 자유농장에 도착했다. 작가이자 건축가로서 김한수 대표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5년 전 원래 숲이었던 1200평 가량의 공간을 새롭게 조성하며 텃밭이기도 하고, 놀이터이기도 하고, 도서관 혹은 학교이기도 한 공간이 탄생했다.
왜 ‘자유농장’일까? 보통은 농장 이름에 지역명을 붙이곤 한다. ‘자유’라는 이름은 농장지기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김한수 대표가 명쾌하게 답했다. “농장 이름이 지역 이름을 따면 (도시농업의 특성상) 옮겨다니다 보면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유농장’은 농장의 이름보다는 그 땅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이름이다. 많은 도시농업 현장에서 ‘땅’은 공동체의 존립을 결정하는 가장 큰 제약 조건이다. 다행히 흥도동의 이 농장은 앞으로도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 같다. 여기에 김한수 대표와 회원들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멋진 공간을 만들었다.
거대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오른쪽 아래 '지렁이 도서관'도 직접 만들었다.
처음부터 전체를 틀밭으로 조성했다. 경운을 최소화하여 탄소 저장 효과를 높이고 풀 관리가 쉽기 때문이다. 맨 땅이 드러난 곳이 거의 없을만큼 낙엽 멀칭을 두둑하게 했다. 천적이 많아서인지 해충 피해가 적은 편이라 생육 초기에 제충국으로 방제하는 정도만 했는데 배추가 싱싱하게 자랐다고 한다. 텃밭을 안내하는 김한수 대표의 말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키가 20m는 훨씬 넘어보이는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유농장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고 그 아래에 생태뒷간과 창고, 평상을 겸한 공간이 있다.
생태뒷간은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쾌적하고 냄새도 거의 없었다. 이 정도 컨디션이면 누구나 생태뒷간에 대한 거부감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책과 함께 농사짓는 지렁이 도서관’이다. 규모도 크지만 세간살이며 테이블과 의자가 넉넉해서 교육과 모임을 위한 공간으로 더할나위 없어 보인다.
자유농장 전경. 대부분 틀밭이다. 오래 함께한 회원 위주로 임대하고 있다.
김한수 대표님이 울금 꽃을 하나 따서 주신다. 자유농장에서는 울금을 매년 심어 환이나 가루로 가공하여 판매도 한다.
농장과 공간 모든 곳에 김한수 대표의 솜씨가 녹아 있다. 10평 작은 농사를 시작한 첫 날, 풀과 흙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종교적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 때부터 텃밭이 마을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지향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그는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지역 신문인 '고양신문'에 텃밭에서 일어나는 많은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빛나는 눈빛으로 생명과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 마치 피터팬 같았다.
왼쪽부터 고도넷 권현숙 사무국장, 안병덕 공동대표, 별명이 둘리 공동대표, 무농약 사과 재배를 실험중이신 공동대표, 김한수 자유농장 대표
고도넷은 올해부터 사무국을 꾸려 시스템 체계를 잡고 회원과의 소통을 강화하고자 한다. 함께 하신 공동 대표님과 사무국장님도 궁금한 것이 많으신지 유튜브 콘텐츠 제작과 회원 관리 등 이것 저것 물어보시고 정보를 나누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탐방과 소통을 통해 도시농업 단체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깊어진 느낌이다. 한편으로 다른 단체의 텃밭과 고민은 무엇일지 궁금증이 더 커진다.
귀한 시간 내어주신 고도넷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탐방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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