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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오슬로 도시농업 탐방기] 2회 공터, 트램 회차로, 묘지가 마을 거실로

아메바!(김충기) 2026. 11. 9. 08:00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 탐방단 10명이 2026년 9월 7일부터 19일까지 독일 베를린과 노르웨이 오슬로의 도시농업 현장 21곳을 다녀왔습니다. 텃밭의 땅은 어떻게 지켜지고, 누가 어떤 돈으로 꾸려 가며, 제도는 그것을 어떻게 뒷받침하는지 질문하고 돌아왔습니다. 베를린의 공유지에 들어선 텃밭과 오슬로의 시립 학교텃밭 농장 등 현장에서 보고 들은 장면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 명의 필자가 프롤로그와 8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도시가 우리의 텃밭이다] 베를린·오슬로 도시농업 탐방기
[프롤로그] 베를린과 오슬로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회 공항 활주로 위에 피어난 자율의 땅 — 템펠호퍼 펠트
2회 주차장, 트램 회차로, 묘지가 마을 거실로 — 베를린의 공동체텃밭들
3회 수확보다 생태와 생존을 배웁니다 — 베를린 텃밭활동학교
4회 감자 파고 밥상 나누는 도심 농장 — 루싸떼르, 야이트뮈라
5회 개인 텃밭에서 협동 농장으로 — 콜로니하게에서 CSA까지
6회 똥·오줌과 하수가 텃밭의 에너지로 — 노르웨이 생명과학대학교
7회 농정이 아닌 환경 행정이 움직인다 — 오슬로와 베를린의 행정
8회 베를린·오슬로가 남긴 질문과 한국 도시농업의 과제

 

[베를린·오슬로 도시농업 탐방기] 2회 공터, 트램 회차로, 묘지가 마을 거실로

— 슐라이펜가르텐, 힘멜베트, 엘리자베트, 프린체시넨가르텐에서 마주한 도시의 자율과 한계 극복의 기록

 

방제식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 이사)

 

들어가며: 베를린의 빈 땅에도 '경작 본능'이 자란다

베를린을 걷다 보면 도시 곳곳의 낡은 벽면을 뒤덮은 그래피티를 마주한다. 1989년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던 장벽이 무너진 뒤, 청년과 예술가들은 방치된 건물을 점거해 자율적인 대안 공간으로 일구어 냈다. '스쾃(Squat)'의 기억이다. 버려진 틈을 찾아 공유지로 바꾸던 이 저항과 자치의 역사가 오늘날 베를린 도시농업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탐방단이 만난 베를린 시민들도 빈 땅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폐쇄된 공항 활주로, 트램이 궤도를 틀던 회차로, 도로변 자투리 공터, 심지어 도심 속 공동묘지까지, 도시의 빈틈마다 상자를 쌓고 흙을 채워 텃밭을 만들었다.

 

그런데 한국의 주말농장이나 구획 분양형 텃밭을 떠올리며 이 공간들에 들어서면 곧 낯선 당혹감과 마주한다. 한국의 주말농장에서는 구획마다 줄을 긋고 "서리는 미풍양속이 아닙니다", "CCTV 단속 중" 같은 안내문을 붙이곤 한다. 내 구획에만 물을 주게 되는 분양의 울타리와 달리, 이곳에서는 공동경작과 공동체의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자물쇠를 채우지 않은 열린 문, 누구나 걷고 쉴 수 있는 널찍한 통로, 휠체어가 드나드는 생태화장실, 이웃이 모여 차를 마시고 노래하는 오두막이 그렇다.

 

트램 회차로 옆의 슐라이펜가르텐(Schleifengarten), 개발에 밀려 정원째 옮겨 온 힘멜베트(himmelbeet), 장례 문화의 변화로 유휴지가 된 묘지 한가운데 자리 잡은 엘리자베트(ElisaBeet), 그리고 도심 공터에서 묘지 숲으로 터전을 옮긴 프린체시넨가르텐(Prinzessinnengarten Kollektiv). 버려진 땅을 이웃이 모이는 '마을 거실'로 바꾼 네 현장을 통해, 도시에서 텃밭이 품어야 할 가치와 한계를 돌파해 나가는 치열한 실험을 들여다본다.

 

트램 회차로와 닫힌 울타리를 허문 '슐라이펜가르텐'

베를린 팡코구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철로 인근에 약 800~900㎡의 아담한 텃밭이 있다. 이름은 슐라이펜가르텐. '슐라이페(Schleife)'는 매듭이나 고리, 혹은 트램이 방향을 틀던 곡선 회차 궤도(loop)를 뜻한다.

슐라이펜가르텐 로고. 트램 회차 부지를 순환의 의미와 함께 표현했다

 

과거 주차장과 트램 회차로로 쓰이던 이 땅은 기름과 폐자재로 오염되었을 우려가 있어, 땅을 파고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철도 잔여지다. 2021년 주차장 계약이 끝나자 인근 주민과 바로 옆 전통 텃밭 단지인 보른홀름 1(Bornholm I) 클라인가르텐 회원들이 머리를 맞댔다. 2022년 10월 협회를 꾸리고 2023년 등록협회(e.V.)로 등록하면서, 주정부 시범사업(Pilotprojekt)으로 상자텃밭 정원을 일구기 시작했다.

 

이곳이 주는 가장 강렬한 시사점은 '전통 텃밭의 폐쇄성을 넘어서려는 시도'다. 독일의 자랑인 클라인가르텐(Kleingarten)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지만, 상당수가 울타리와 닫힌 문 때문에 외부인에게는 '개인들의 섬'처럼 여겨져 왔다. 슐라이펜가르텐은 이 단단한 울타리를 안에서부터 허무는 실험을 한다. 주정부 땅을 클라인가르텐 협회가 빌리고 이를 슐라이펜가르텐 협회가 다시 전대하는 구조를 취하면서도, 문은 동네 모든 사람에게 열어 두었다.

 

입구 부근의 상자텃밭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낮은 상자에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딸기와 방울토마토가 자라고, 성인용 상자 옆에는 하부를 비워 휠체어를 탄 채 다리를 넣고 식물을 만질 수 있는 배리어 프리(Barrier-free) 상자텃밭이 놓여 있었다. 하수관을 묻을 수 없는 조건은 주정부와 구청의 초기 지원으로 휠체어가 회전할 수 있는 규격의 건식 분리형 이동식 생태화장실을 지어 풀었다. 대소변을 따로 모으고 밀짚을 썰어 넣어 냄새를 막으며 퇴비로 순환시키는 생태 인프라다. 국내에도 이런 시설은 많지만, 이곳은 유난히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슐라이펜가르텐의 배리어 프리 텃밭. 휠체어를 탄 채 상자 아래로 다리를 넣고 경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베리어 프리 생태화장실. 하수도는 없지만 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다.

 

탐방단은 이곳을 예약 없이 찾았다. 방문 당일 오전과 오후에 예약된 인사들이 모두 몸이 좋지 않아 만나기 어렵다는 연락을 받으면서, 원래 일정에 없던 곳을 들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지나쳤다면 어쩔 뻔했나 싶을 만큼 모두가 좋아했다. 주말에 열릴 정원 축제를 준비하던 회원 발레리아 로씨트(Valeria Rossit)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예고 없이 찾아온 동양의 낯선 이들에게 슐라이펜가르텐을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30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오래 알던 사이처럼 가까워져 헤어짐이 아쉬웠다. 우리가 준비해 간 영주 장인의 호미를 선물하자 아이처럼 기뻐했다.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도록 텃밭 입구에 마련한 쉼터. 기타와 타악기를 들고 노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여유롭다.

 

이곳은 회원 30여 명이 자율적으로 노동을 나누고, 문이 열려 있으면 지나가던 시민 누구나 들어와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다 가는 곳이다. 슐라이펜가르텐은 클라인가르텐이 지닌 고립과 개인화를 넘어 도시의 공공재로 거듭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안내를 마치고 나서는 길, 입구 벤치에서 낯선 중년 남녀 한 쌍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고 있었다. 안내해 준 발레리아에게 회원이냐고 묻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분들은 저도 오늘 처음 보는 분들이에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텃밭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이 한 장면이 클라인가르텐의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전의 위기를 넘어 연대와 포용으로 지킨 '힘멜베트'

베를린 미테구 베딩(Wedding) 지구, S-Bahn이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고가 철로 옆 도로 녹지에 힘멜베트가 있다. 약 2,000㎡가 넘는 부지에 개당 1㎡ 남짓(80×120cm)한 상자텃밭 200여 개가 다양한 색과 모습으로 늘어선 이곳은 베를린 공동체텃밭 운동의 심장부와 같은 곳이다.

 

활동가 린 튀어크(Lynn Türk)는 정원을 소개하기에 앞서 "여기가 참 시끄럽지요?" 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소음 뒤편에는 땅을 둘러싼 도시의 지난한 투쟁이 새겨져 있다. 힘멜베트는 원래 레오폴트플라츠 인근에 있었으나, 2021년 토지 계약 만료와 부지 반납 압박에 직면했다. 개발 압력 앞에서 문을 닫는 여느 텃밭과 달리 이들은 해체를 거부했다. 상자텃밭 200개와 오두막, 야외 유르트(Jurte), 카페 부스, 대형 퇴비장을 통째로 트럭에 실어 2021년부터 2022년에 걸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텃밭 입구 게시판. 초보자를 위한 상담 시간 안내와 벼룩시장, 음악 공연, 언어 카페 같은 행사 소식이 적혀 있다.

 

도심의 땅을 영구히 소유할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힘멜베트는 '가변성과 연대의 힘'으로 돌파했다. 구청 도로녹지관리청과 맺은 계약은 5년 단위 특별이용권(Sondernutzung)이다. 언제 다시 짐을 싸야 할지 모르는 불안정함 속에서도 운영은 흔들리지 않는다. 설립 때 약 10명이 출자해 세운 공익유한회사(gGmbH, gemeinnützige Gesellschaft mit beschränkter Haftung)를 지금은 활동가 9명이 대표 없이 같은 시급으로 수평적으로 꾸려 간다.

 

힘멜베트의 게시판과 상자텃밭은 색깔로 메시지를 던진다. 운영진이 직접 관리하는 파란색 화단, 개인이나 단체가 비용을 내고 빌려 쓰는 나무색 화단,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지나가는 행인도 수확할 수 있는 초록색 화단 '모두를 위한 공동 텃밭(Gemeinschaftsbeete für ALLE)'이다. 힘멜은 독일어로 '하늘'을 뜻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여러 색 가운데 파란색은 힘멜베트를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200여 개 상자 중 10개는 인근 난민 지원단체, 장애인 시설, 노인 요양원 같은 사회적 약자 단체에 무상으로 내준다. 회비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적게, 여유 있는 사람은 자율적으로 더 내는 '연대 회비(Solidarischer Beitrag)' 방식이다. 금·토·일에 문을 여는 가든 카페는 까다로운 요식업 허가와 자본의 논리를 피하려고 모든 음료와 케이크를 '자발적 기부금(Spende)'으로 운영한다.

휴식 중인 탐방단. 오른쪽 건물이 카페이고, 힘멜베트를 상징하는 파란색이 돋보인다.

 

현장에서 들은 가장 놀라운 소식은 정원 담장 너머의 차도에서 들려왔다. 튀어크는 약 2주 뒤부터 힘멜베트 바로 앞 도로인 가르텐슈트라세(Gartenstraße)의 차량 통행이 막힌다고 설명했다. 도로녹지관리청과 협상한 결과이며, 지역 정치권의 지원이 있었다고 했다. 귀국 후 자료를 찾아보니 이 구간은 녹지로 바뀌며, 9월 말에 공사가 시작돼 11월 초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행정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환경 개선 사업이 아니다. 베를린 풀뿌리 교통 전환 단체인 '체인징 시티즈(Changing Cities)'와 동네 주민들이 주도한 키츠블록(Kiezblock, 골목 통과 차량을 줄이고 보행자와 녹지 중심의 생활 공간을 되찾는 시민운동) 청원을 미테구청 도로녹지관리청이 전격 수용하면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동안 힘멜베트는 주민들이 모여 동네의 교통 문제를 성토하고 서명을 모으는 실질적인 공론장이자 거점 역할을 해 왔다.

 

개발 압력에 밀려 쫓겨오듯 자리 잡았던 임시 텃밭이, 거꾸로 아스팔트 차도를 멈춰 세우고 공공 녹지를 확장해 냈다. 텃밭이 단순히 작물을 기르는 경작지를 넘어, 도시의 불합리한 개발과 교통 체증을 막아서는 '시민 정치의 베이스캠프'로 작동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묘지 한켠에서 자라난 연대의 텃밭 '엘리자베트'

베를린 미테구 성 엘리자베트 II 묘지(St. Elisabeth II Friedhof)의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묘비 사이로 믿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진다. 무성한 초록 잎과 탐스럽게 익은 토마토, 붉은 꽃이 가득한 노지 채소밭, 바로 엘리자베트(ElisaBeet)다.

엘리자베트 묘지 풍경

 

엘리자베트는 베를린의 장례 문화가 매장에서 화장 중심으로 급격히 바뀌며 생긴 묘지 유휴지를 활용한 대표적 시범 사례다. 공영 묘지와 달리 녹지 관리 지원금이 나오지 않아 재정난을 겪던 개신교 묘지연합(Evangelischer Friedhofsverband) 관할 묘지에서, 교구 행정실이 부지 활용을 두고 주민 설문조사를 벌였다. 주민들의 답은 "가까이서 흙을 만지고 쉴 수 있는 초록 휴식 공간"이었다. 여기에 힘멜베트 공익유한회사가 손을 잡아, 2020년 조성을 시작해 2021년 문을 열었다.

도심 주택가의 묘지. 숲 같은 공원묘지 한쪽에 엘리자베트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도심 텃밭의 고질적 한계인 토양 오염 문제도 지혜롭게 비켜 갔다. 채소밭이 들어선 자리는 과거에 묘를 쓴 적이 없는, 묘지 관리용 나뭇가지와 부산물을 쌓아 두던 작업장 부지다. 오염되지 않은 땅 덕분에 상자텃밭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노지 경작과 비닐하우스 모종 재배가 가능했다. 오래 쌓아 둔 나뭇가지와 잎은 땅을 기름지게 했다.

 

엘리자베트의 핵심 운영 모델은 연대농업(Solawi, Solidarische Landwirtschaft. 한국에서는 공동체지원농업, CSA로 알려져 있다)이다. 한국의 도시농업이 대체로 분양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구조라면, 이곳에서는 상근 원예사(Gärtner) 1명과 담당 활동가 2명이 농사를 짓고, 회원 26명이 1년치 생산비를 나누어 낸다.

 

회비를 정하는 방식도 독특하다.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 원예사가 종자대와 자재비, 자신의 노동 수당을 합산해 1년 농사 예산을 발표한다. 그러면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입찰(Bieterrunde, 편집자 주: 회원이 각자 낼 수 있는 금액을 써내 연간 예산을 채워 가는 방식) 방식으로 분담액을 정한다. 소득 증빙 서류는 요구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들은 평균 분담액은 월 25유로였고, 사람에 따라 5~50유로까지 폭이 있었다. 매주 화요일 수확일이 되면 회원들은 같은 양의 채소 꾸러미를 받아 간다.

 

엘리자베트는 회원이 아닌 주민도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매주 금요일 공동 작업일이면 주민들이 기꺼이 찾아와 흙을 만지고 김을 맨다. 묘지라는 서늘한 공간의 낙인은 온데간데없고, 울창한 숲과 채소밭이 어우러진 도심 속 가장 고요하고 안전한 쉼터로 주민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도심 공터에서 묘지 숲으로 옮겨 간 '프린체시넨가르텐'

베를린의 도시농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프린체시넨가르텐 콜렉티브다. 2009년 크로이츠베르크 모리츠플라츠의 쓰레기 방치 부지에 이동식 상자텃밭을 놓으며 독일 어반 가드닝의 상징이 된 이곳은, 부지 개발과 임대 조건이 바뀌자 개신교 묘지연합의 초청을 받아 2020년 노이쾰른의 새 성 야코비 묘지(Neuer St. Jacobi Friedhof) 유휴지로 터전을 옮겼다. 운영 주체는 공익유한회사 노마디쉬 그륀(Nomadisch Grün gGmbH)이다.

 

탐방단은 공식 인터뷰 없이, 현장에서 일하던 자발적 생태의 해(Freiwilliges Ökologisches Jahr, FÖJ) 청년 활동가의 안내로 이곳을 둘러보았다. 아래 현장 서술은 그 안내와 둘러본 인상에 바탕을 둔다.

 

묘지 안으로 들어서면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상자텃밭 100여 개와 노지텃밭이 넓게 펼쳐진다. 이곳에도 개인에게 나누어 주는 구획은 없다. 그날의 할 일이 적힌 '작업 목록'을 보고 찾아온 이웃과 자원봉사자가 품을 보태며 함께 가꾼다. 안내해 준 청년은 이곳에서 FÖJ 청년 9명이 일한다고 했고, 이들은 텃밭뿐 아니라 인근 공원의 공공 녹지 물주기에도 교대로 나간다고 했다. 카페 운영과 모종 판매, 묘지 녹지 관리 위탁 같은 수입이 자립의 기반이다.

 

임대 조건이 바뀌어 옮겨야 했던 실험이 묘지와의 상생으로 이어졌다. 도심의 다양한 공간이 어떻게 텃밭으로, 공공의 숲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프린체시넨가르텐 콜렉티브, 구역별로 계획된 농사계획들
프린체시넨가르텐 콜렉티브의 상자텃밭과 노지텃밭의 풍경

 

네 곳의 텃밭을 함께 걸었어도 탐방단마다 마음에 남은 장면은 달랐다. 조이는 풍경 앞에서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오랜 질문을 다시 꺼내 들었다. 탐방 중 틈틈이 읽은 구현주 저자의 『공동체의 감수성』을 길잡이 삼아 정리한 시선을 소개한다.

[탐방단의 시선] 공동체, 다시 봄


나는 줄곧 '공동체'에 관심이 많았다. 공동체의 좋은 사례를 소개한 책을 읽고, 직접 마을공동체 사업을 신청해 운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공동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여전히 모호한 상(象)과 의문이 남았다.

베를린에서 방문한 공동체텃밭과 활동가들의 인터뷰, 그리고 탐방 기간 동안 틈틈이 읽었던 구현주 저자의 『공동체의 감수성』은 내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도시에서 텃밭을 통해 공동체를 만들고, 그 안에 속하고 싶다'는 도시농업 활동가로서의 막연한 희망에 구체적인 방향성과 사례를 보여 준 것이다.

저자는 책의 초반에서 '마을공동체 사업이 과연 민주적 조직구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삶의 의제에 직접 참여하고, 여러 주체와 연대하는 운동성을 가졌는지 중간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한다. '민주적 조직 구조', '삶의 의제에 직접 참여', '연대하는 운동성'. 이 세 가지 키워드는 내가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공동체텃밭에도 똑같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민주적 조직 구조'는 베를린 공동체텃밭의 운영과 활용 규칙을 정하는 정기총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참여 자격에 제한이 없거나(심지어 지나가는 행인도 참여할 수 있다!), 콜렉티브(Kollektiv, 공동운영그룹)라고 부르는 공동 운영자와 참가자 자조 조직(e.V.)이 함께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사소한 것부터 중대한 안건까지 토론을 거쳐 만장일치를 지향하며 의사를 결정한다.

도시의 방치된 땅을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지켜내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서 베를린 공동체텃밭 운동은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의제에 대한 실천과 자원봉사는 공동체텃밭을 유지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연대하는 운동성'을 텃밭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핵심은 개방성과 포용성이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비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공간 요소, 운영 방식 등이 차별과 배제를 없애기 위해 세심하게 고려되고 반복적으로 강조되었다.

공동체의 모습이 다양한 만큼 공동체텃밭도 다양한 형태로 운영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관계를 지향하는가를 고민하며 텃밭을 바라볼 때, 위의 세 가지 가치도 함께 고려해 보면 어떨까.

탐방 기간 동안 조금 더 선명해진 상(象)과 깊어진 고민이 머릿속을 맴돈다.
(석지영)

 

베를린의 텃밭, 한국과 무엇이 다른가

네 곳을 둘러보며 탐방단이 가장 깊이 절감한 것은 '텃밭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였다.

 

첫째, '생산 구획'이 아닌 '마을 거실'로서의 가치다.

한국의 도시농업은 지난 20년간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1인당 분양'이라는 사적 점유와 수확량 중심의 틀이 여전히 강하다. 분양받지 못한 주민에게 텃밭은 높은 울타리가 쳐진 배타적 공간이기 쉽다. 반면 베를린의 텃밭들은 문턱을 극단적으로 낮추었다. 모든 텃밭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이런 시도를 한다. 경작 면적을 줄이더라도 쉼터, 야외 주방, 아이들의 놀이터, 장애인을 위한 동선을 먼저 확보한다. 프린체시넨가르텐처럼 개인 구획 없이 작업 목록을 보고 이웃이 함께 가꾸는 곳도 있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누구나 들어와 머무를 수 있는 공공의 쉼터, 곧 '마을의 거실'이 되려는 시도다.

 

둘째,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지 않고 결핍을 기술과 연대로 채우는 태도다.

이렇게 쓰다 보니 베를린의 텃밭이 아무 문제도 없는 이상향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의 환경 역시 결코 녹록지 않았다. 기름으로 오염된 철도 부지, 상하수도와 전기가 없는 도로변, 5년 뒤 쫓겨날지 모르는 단기 계약, 죽은 자들의 공간이라는 편견까지. 그래도 베를린 시민들은 "조건이 안 돼서 못 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땅이 오염되었기에 상자텃밭과 빗물 저금통을 만들었고, 하수관이 없기에 휠체어도 들어갈 수 있는 규격으로 밀짚을 쓰는 건식 생태화장실을 설치했다. 땅을 소유할 수 없기에 정원 전체를 트럭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이동식 모듈(상자텃밭)을 고안했다. 사회주의권 무역이 무너진 1990년대 초 식량 위기를 맞은 아바나 시민들이 빈터와 낡은 주차장에 오르가노포니코(유기농 도시 텃밭)를 일군 것처럼, 결핍이 생태적 대안과 새로운 기술을 낳는 산실로 작용하고 있었다.

 

셋째, 신뢰에 기반한 사회적 연대 경제다.

텃밭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회비를 차등 납부하는 '연대 회비'와 입찰(Bieterrunde, 자율적으로 분담액을 적어내는 방식)을 통해 빈부의 격차를 자연스럽게 품어 안았다. 증명서 대신 신뢰에 기반한 문화가 텃밭 회원들의 토양이 되고 있었다.

 

우리에게 없는 제도, 그러나 고민해야 할 실험들

이러한 실험이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베를린 특유의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다. 현재 한국의 법과 행정 체계로는 당장 구현하기 어렵지만, 도시농업이 한 단계 도약하려면 고민해야 할 지점들을 살펴본다.

 

도시농업을 '농정'이 아닌 '공간 정책'과 '환경 정책'으로 다루는 행정 틀

베를린에서 도시농업을 맡은 주무 부처는 농업 부서가 아니라 모빌리티·교통·기후보호·환경부(SenMVKU)다. 도시농업을 단순한 농사 체험이나 작물 재배가 아니라, 도심 열섬 현상을 누그러뜨리고 생물다양성을 지키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도시계획적 자유공간(Freiraum)'이자 공공 인프라로 접근한다. 이 부처에는 힘멜베트 창립 멤버이기도 한 활동가 출신 담당관 토니 카르게(Toni Karge)가 있다. 2023. 01. 24. 베를린 주정부(Senat)가 의결한 「베를린 공동체텃밭 프로그램」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도시 유휴 부지를 발굴하고 장기 사용권을 보장하려고 노력하는 정책이다. 지자체 농축산과의 단기 보조금 사업에 매달려 있는 한국 도시농업에 절실한 전환점이다.

 

도심 유휴 국·공유지의 가변적·한시적 점용 제도화

한국 도시에도 철도 잔여지, 재개발 지연 부지, 공공기관 이전 공터 같은 유휴지가 수년, 수십 년째 방치돼 있다. 사고가 났을 때의 법적 책임과 "행정 재산을 함부로 내줄 수 없다"는 보수적 관리주의 때문이다. 베를린처럼 5년 단위의 특별이용권 계약을 맺고, 땅을 파지 않는 상자텃밭과 이동식 생태화장실의 가이드라인을 표준화한다면, 도심의 버려진 땅이 시민의 녹색 쉼터로 바뀔 수 있다.

 

공익유한회사와 같은 사회적경제 주체의 안착

비영리민간단체의 자원봉사와 불안정한 회비에만 의존해서는 텃밭의 일상 관리를 담보하기 어렵다. 이윤 배분은 금지하되 전문 인력을 정당한 대가로 고용하고, 지자체 용역과 생태 교육 워크숍, 기부형 카페 등으로 자립 기반을 다질 수 있는 법적·제도적 유연성이 필요하다.

 

이런 제도가 우리 마을에 닿으면 어떤 모습일까. 도림공동체텃밭에서 텃밭지기를 하는 최영이는 베를린의 정책과 운영 방식을 자기 동네 풍경 위에 겹쳐 보았다. 담당관 토니 카르게가 구상 중인 지원금 제도와 힘멜베트의 수평적 근무 형태를 바라본 최영이의 시선을 소개한다.

 

[탐방단의 시선] 도시의 빈틈을 마을의 품으로, 베를린 텃밭이 건넨 답


베를린의 주택건설 압력 속에서도 커뮤니티 공간, 어린이 놀이터, 병원, 학교, 도로 및 주차장, 건물 옥상, 공원 등 한켠에 어떻게든 텃밭 공간을 확보하려는 정책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 인천도 베를린처럼 주택난이 있지만, 마을 곳곳을 둘러보면 텃밭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 보인다. 노인정 앞, 공영주차장, 학교 벽면, 인도, 신호등 교차로 옆, 공공도서관 안의 화단을 대신해 텃밭을 설치하고, 지나가는 누구라도 수확할 수 있는 힘멜베트의 초록색 화단처럼 모두를 위한 공동 텃밭을 만들면 좋겠다. 텃밭의 크기와 규모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담당관 토니 카르게가 구상 중인 '모든 텃밭에 연 1,000~2,000유로를 조건 없이 똑같이 지급하는 제도'도 좋았다. 한 해 농사에 필요한 최소한의 예산을 지원해 열린 텃밭 운영이 지속되도록 돕고, 지원 조건을 낮춰 회계 과정까지 간소하게 해 주는 정부의 배려가 보였다. 꼭 실현되었으면 좋겠다.

힘멜베트와 엘리자베트를 운영하는, 대표 없이 9명의 활동가가 수평 구조로 일하는 근무 형태도 인상적이었다. 9명보다 적은 인원이 전일제로 일할 수도 있지만, 최대한 여러 명이 파트타임으로 나누어 함께 일하는 방식이다. 공동체텃밭을 운영하려면 공동체 모임 만들기, 텃밭 청소, 농기구·퇴비간·생태화장실 관리, 회의 참석, 회계 등 여러 역할이 필요하다. 이 역할들을 텃밭지기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 팀을 이루어 나눈다면, 다양한 활동가를 중심으로 공동체텃밭이 활성화되고 한 사람에게 몰리는 부담도 덜 수 있을 것이다.
(최영이)

활동가 출신 주정부 담당관 토니 카르게가 옥상, 학교, 공원, 길가, 테라스 등 텃밭을 만들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을 설명하고 있다.

 

맺으며: 우리는 텃밭에서 무엇을 일구고 있는가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베를린의 텃밭들은 탐방단에게 묵직한 울림과 함께 몇 가지 질문을 남겼다.

 

첫째, 현대 도시에서 공간은 어떤 의미일까? 자본은 도시의 모든 빈 땅을 아파트로, 상가로, 도로와 주차장으로 바꾸어 사적 이윤을 극대화하라고 요구한다. 베를린 역시 극심한 주택난 속에서 텃밭을 허물라는 개발의 압력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트램 회차로의 자투리땅을 파고들었고, 쫓겨나면서도 텃밭 상자를 짊어지고 다른 공터로 옮겨 갔으며, 묘지 한구석을 빌려 기어코 생명의 싹을 틔워 냈다.

 

둘째, 그들은 왜 그토록 치열하게 텃밭을 지키려 했을까? 그들에게 텃밭은 상추와 배추를 길러 식탁을 채우는 '생산의 장소'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차별과 배제의 압력이 큰 도시에서 누구든 조건 없이 숨을 고를 수 있는 '환대의 공간'이었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웃들이 얼굴을 맞대고 마을의 미래를 의논하는 '자치의 광장'이었다.

 

셋째, 한국의 도시농업은 지난 20년간 무엇을 일구어 왔는가. 우리는 텃밭이라는 이름 아래, 도시의 사유화와 개발 논리를 그대로 복제한 채 몇 평짜리 작은 '나만의 영지'를 분양받는 일에 만족해 온 것은 아닐까?

 

버려진 회차로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텃밭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던 발레리아 로씨트의 미소, 소음 가득한 도로변에서 차도를 막아 내며 아이들이 안전한 녹지공간을 만들어 가던 힘멜베트의 땀방울, 묘지 한켠을 주민의 녹지로 되살려 낸 엘리자베트의 텃밭이 지금 우리를 향해 묻고 있다.

 

"당신의 텃밭은 안녕하신가요? 그 텃밭의 문은 지금 이웃을 향해, 그리고 마을과 도시의 회복을 향해 얼마나 열려 있나요?"

 


추가자료

[탐방기관별 종합보고서]

* 4곳의 공동체텃밭의 자료조사와 현장방문으로 얻은 정보와 탐방단의 목소리를 담은 종합보고서를 더 살펴보세요.

베를린_기관보고서_07_슐라이펜가르텐.docx
1.33MB
베를린_기관보고서_08_프린체시넨가르텐.docx
1.50MB
베를린_기관보고서_09_힘멜베트.docx
1.28MB
베를린_기관보고서_10_엘리자베트.docx
1.41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