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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입동] 무 뿌리를 재보는 아침

아메바!(김충기) 2026. 11. 7. 08:25

[제19화: 입동] 무 뿌리를 재보는 아침 — 5평 텃밭, 겨울 땅에 푸른 이불을 깔다

 

어제밤 늦게 집에서 발견한 무 한 뿌리.
막내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키운 무를 뽑아왔다. 무청 부터 꼬리까지 꾀나 단단하고 실하다. 조상들은 뿌리가 길게 내려간 해는 겨울이 춥다고 했다. 과학적인 말은 아닐 수 있으나 그래도 마음에 남는 대목이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대신 땅속을 들여다보며 겨울을 가늠했다는 점이다. 겨울 채비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걸, 무 한 뿌리가 일러주고 있었던 셈이다. 겨울이 일어서는 절기, 입동(立冬)이다.

 

절기 이야기: 겨울이 서는 날, 곳간을 채우다

입동은 24절기 중 열아홉 번째 절기로, 2026년에는 11월 7일(토)에 든다. '설 입(立)'에 '겨울 동(冬)', 말 그대로 겨울이 서는 때이다. 이날부터 입춘 전날까지를 겨울로 본다.

 

입동 하면 가장 먼저 김장이 떠오른다. 입동 전후 닷새쯤을 김장 적기로 보았다. 이 무렵이면 배추가 얼기 시작해 일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입동 전 김장이 좋다"는 속담은 날짜를 알려주는 말이 아니라, 얼기 전에 서두르라는 말이다. 김장은 집집이 하는 일이면서 이웃이 모여 함께 하는 일이었고, 2013년에는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올랐다. 인정받은 것은 김치 맛이 아니라 나누는 손길이다.

 

입동에는 치계미(雉鷄米)라는 풍속도 있었다. 마을에서 어르신을 모시고 음식을 대접하는 경로잔치로, 입동과 동지, 섣달그믐에 열었다고 한다. 햅쌀과 햇곡식으로 팥시루떡을 쪄 곳간과 외양간에 고사를 지내고 이웃과 나눠 먹기도 했다. 거둔 것을 혼자 쥐지 않고 겨울 앞에서 돌려 나누는 절기였다.

 

겨울 곡식에 얽힌 말도 하나 전한다. "입동 전 가위 보리"는 입동 전에 보리 잎이 가위처럼 두 장 나야 이듬해 보리 농사가 잘된다는 속신이다. 곳간을 채우는 손과 겨울을 날 씨앗을 땅에 맡기는 손이 같은 때 바빴다는 이야기이다.

 

농사 이야기: 거두고 덮고, 비운 땅을 비워두지 않는다

전통 농가에서 입동은 가을걷이와 김장, 월동 채비가 한꺼번에 몰리는 때이다. 배추와 무를 거두고, 겨우내 먹을 채소를 갈무리하고, 보리처럼 겨울을 나는 작물을 살핀다.

 

도시텃밭의 입동도 같은 순서로 움직인다. 첫째는 배추와 무 수확이다. 배추는 겉잎을 모아 짚이나 끈으로 느슨하게 묶어 올리면 속이 단단해지고 찬바람을 덜 맞는다. 김장 시기는 입동 전후 닷새를 기준으로 삼되, 텃밭 배추의 속 찬 정도를 보고 정한다. 무는 얼기 전에 뽑아 잎을 자르고, 흙이 묻은 채 그늘에서 말려 서늘한 곳에 둔다.

 

둘째는 남은 수확물 정리이다. 상강 때 콩을 거둔 자리, 고추와 고구마 줄기를 걷어낸 자리, 늦게까지 버틴 잎채소 자리가 하나둘 비기 시작한다. 걷어낸 줄기는 뽑지 말고 베어 눕혀 덮개로 쓴다.

 

셋째는 비워진 자리를 어떻게 겨울나게 하느냐이다. 맨흙으로 두면 겨울바람에 마르고, 찬비에 다져지고, 얼었다 녹기를 되풀이하며 푸석해진다. 5평 텃밭에서는 이 한 가지만 잘해도 이듬해 봄이 달라진다. 덮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죽은 이불인 낙엽과 볏짚을 덮는 방법, 살아 있는 이불인 겨울 작물을 키우는 방법이다. 마늘과 양파밭은 이미 낙엽으로 덮었으니, 나머지 빈자리를 호밀이 맡는다.

날씨도 함께 살필 때이다. 기상청 예보로는 입동 이틀 전인 5일에 인천까지 비가 내리고 오후에 그치며, 예상 강수량은 5㎜ 안팎이다. 6일에는 북서쪽 찬 공기가 내려와 바람이 세지고 기온이 낮아진다. 입동 당일인 7일 아침 기온은 전날보다 5~9도 더 떨어지고, 내륙 중심으로 영하권에 얼음이 어는 곳도 있겠다고 한다. 비가 그친 뒤 바람이 불기 전에 배추 겉잎을 묶고, 7일 아침 전에 남은 수확물과 모종을 걷어 두는 것이 좋다.

 

입동에 텃밭에서 할 일

  • 무 뽑고 뿌리 살피기: 얼기 전에 뽑는다. 뿌리 길이를 한 번 재보고, 잎은 잘라 시래기로 말린다. 흙은 털지 말고 그늘에서 말린 뒤 서늘한 곳에 둔다.
  • 배추 겉잎 묶기와 수확: 속이 찬 것부터 김장 일정에 맞춰 거둔다. 아직 덜 찬 것은 겉잎을 묶어 올려 찬바람을 막아준다.
  • 빈 땅 고르기: 고추, 토마토, 가지, 콩, 고구마를 걷은 자리를 모아 호밀 뿌릴 땅을 정한다. 거둔 줄기는 베어서 눕힌다.
  • 호밀 뿌리기: 흙을 갈퀴로 가볍게 고르고 씨앗을 고루 흩어 뿌린 뒤 흙을 얇게 덮는다. 5평 전체에 뿌려도 300g 안팎이면 된다.
  • 마늘·양파밭 낙엽 덮기: 한로 때 심은 마늘 줄 위에 낙엽과 볏짚을 두툼하게 덮는다. 양파 모종은 뿌리를 내렸는지 살핀다.
  • 낙엽 모으기와 퇴비 더미 덮기: 길가 낙엽을 넉넉히 모아 퇴비 더미 위에도 덮어둔다. 비와 찬바람을 맞으면 거름기가 빠져나간다.
  • 김장 나눔 계획 세우기: 텃밭에서 거둔 배추와 무를 이웃과 어떻게 나눌지 정해둔다. 치계미의 마음이다.
  • 밤 기온 기록 이어가기: 백로 때 시작한 기록에 영하로 내려간 첫날을 적는다.

땅을 덮는 풀 — 호밀

겨울을 나는 곡식 가운데 호밀만큼 추위에 강한 작물이 드물다. 호밀은 겨울 곡식 중 추위에 가장 강하고, 메마른 땅에서도 자라며, 봄이 되면 가장 먼저 푸르게 올라온다. 사람이 먹으려고 심는 작물이 아니다. 키워서 거두지 않고 그대로 땅에 돌려주는 풀, 이런 작물을 녹비(綠肥), 말 그대로 푸른 거름이라 부른다.

 

호밀이 겨울 텃밭에서 하는 일은 세 가지이다.

 

첫째, 덮는다. 푸른 잎이 맨흙 위를 덮어 겨울바람과 찬비가 흙을 직접 때리지 못하게 막는다. 흙은 빗물에 쓸려가지 않고, 얼었다 녹기를 되풀이하는 사이에도 덜 부서진다. 낙엽이 죽은 이불이라면 호밀은 살아서 자라는 이불이다.

 

둘째, 뿌리로 흙을 푼다. 호밀 뿌리는 촘촘하게 땅속으로 뻗으며 딱딱한 흙에 길을 낸다. 고추 역병이 자주 드는 밭에서 겨울 동안 호밀을 키운 연구에서는 흙의 부피 밀도가 낮아지고 공기가 드나드는 틈이 늘었으며, 흙 속 미생물 무리도 한층 다양해졌다고 한다. 겨울 동안 눈에 띄지 않게 땅을 갈아주는 일꾼인 셈이다.

 

셋째, 봄에 거름이 된다. 이듬해 봄 이삭이 패기 시작할 무렵 낫으로 베어 그 자리에 눕히면, 겨우내 키운 푸른 잎이 미생물과 지렁이의 밥이 된다. 소서 편에서 풀을 뽑지 않고 베어 눕혔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뿌리째 뽑거나 깊이 갈아엎지 않아야 흙 속 살림이 덜 다친다.

 

시기를 보자. 호밀은 10월 상순에서 중순에 뿌리는 것이 적기이다. 입동은 그보다 늦다. 늦게 뿌리면 이삭이 늦게 패고 키도 덜 자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래도 추위에 강한 작물이라 지금 뿌려도 늦지 않다. 다만 다른 자리에 뿌린 것보다 푸른 이불이 얇을 수 있으니, 낙엽 한 겹을 가장자리에 보태 균형을 맞춘다.

 

호밀 씨앗은 한 줌이 아니라 저울에 달아 쓴다. 5평은 16.5㎡이니, 10a(1,000㎡)에 16~20kg씩 뿌린다는 기준을 줄이면 270~330g쯤이다. 씨앗을 고루 흩어 뿌리고 얇게 덮어 가볍게 눌러준다.

 

이웃도 잘 정해야 한다. 호밀을 어디에 뿌릴지는 올여름 무엇을 심었는지에 달려 있다. 고추, 토마토, 가지를 키운 자리는 한 식구(가짓과)라 이어짓기를 피해야 한다. 그 자리에 호밀을 깔고, 내년에는 오이, 호박, 콩처럼 다른 식구를 들이는 편이 흙도 병도 쉬게 해준다. 호밀을 벤 자리에는 작은 씨앗을 바로 뿌리지 말고 모종을 옮겨 심는 쪽이 안전하다. 호밀은 주변 풀의 싹을 억누르는 성질이 있어 상추나 당근 같은 작은 씨앗은 싹이 잘 안 틀 수 있기 때문이다.

 

콩과 식물인 헤어리베치를 섞어 뿌리면 거름기가 더해진다. 다만 마늘이나 양파 곁에는 두지 않는다. 망종 편과 하지 편에서 이야기한 이유와 같다. 마늘 향이 콩 뿌리의 일을 막는다.

 

무 뿌리가 길어야 겨울이 추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겨울 땅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뿌리를 보면 안다. 빈 땅에 푸른 뿌리를 내려주는 것, 입동 텃밭이 하는 가장 조용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