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처서] 풀이 걸음을 멈추면 무 씨를 넣는다 - 김장의 첫 단추
[제14화: 처서] 풀이 걸음을 멈추면 무 씨를 넣는다 - 김장의 첫 단추

풀 베는 손이 가벼워졌다.
소서 무렵에는 비 그친 다음 날 나가보면 어제 없던 풀이 무릎께까지 올라와 있었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었다. 그런데 팔월 하순으로 접어들면 그 기세가 눈에 띄게 꺾인다. 베어 눕힌 자리가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 있다. 볕은 여전히 따가운데 풀은 더 자라지 않는다. 풀의 기세가 꺾이는 이때에 맞춰 논두렁을 깎고 산소를 찾아 벌초를 했다. 처서(處暑)이다.
절기 이야기: 더위가 물러나 머무는 자리
처서는 24절기 중 열네 번째 절기로, 양력 8월 23일 무렵에 든다. 입추와 백로 사이이며, 올해는 8월 23일 일요일 낮에 들었다. 한자를 풀면 '머무를 처(處)'에 '더울 서(暑)'이다. 더위가 그친다는 뜻으로 흔히 새기지만, 글자 그대로 보면 더위가 물러나 제자리에 머문다는 말에 가깝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물러앉는 것이다.
처서를 둘러싼 옛말은 대개 서늘해지는 기운과 관렸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여름내 사람을 괴롭히던 파리와 모기의 성화가 수그러들고, 그 자리를 귀뚜라미 소리가 채우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며 돌아간다"는 말도 있다. 그악스럽게 자라던 풀조차 더 크기를 포기하고 물러난다는 것이다. 밭을 매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안다.
반대로 벼는 이때가 한창이다. 무엇이 한꺼번에 성한 것을 두고 "처서에 장벼 패듯"이라 했다. 장벼란 이삭이 팰 만큼 다 자란 벼를 말한다. 그래서 이 무렵의 비는 반갑지 않았다. "처서에 비가 오면 십리에 천석 감한다"는 말이 영남과 호남, 제주까지 두루 전한다. 이삭이 패는 때에 볕이 모자라면 벼가 여물지 못한다.
처서에는 포쇄(曝曬)라는 살림의 일도 있었다. 여름 장마에 눅눅해진 옷과 책을 꺼내 볕에 말리는 일이다. 조선의 관청에서는 실록을 보관한 사고를 열어 책장을 한 장씩 넘겨 바람을 쐬게 했다. 습기를 머금은 채로 두면 좀이 슬고 종이가 삭기 때문이다. 「농가월령가」 칠월령에도 장마를 겪었으니 집안을 돌아보아 곡식을 거풍하고 의복을 포쇄하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름 볕이 물건을 상하게 했다면, 처서의 볕은 그 물건을 살린다.
처서는 음력 칠월 보름 백중의 호미씻이가 끝나는 무렵이기도 하다. 입추에 김매기가 끝나 어정어정 건들건들 지낸다는 "어정칠월 건들팔월"을 이야기했는데, 그 드문 한가함이 처서에서 마감된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손이 바빠진다.
농사 이야기: 김장 채소가 밭으로 들어가는 때
처서 전후는 김장 채소의 파종과 아주심기가 겹치는 시기이다.
무는 모종을 기르지 않고 밭에 씨를 바로 넣는다. 중부지방 기준으로 8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가 파종 적기이고, 심어서 거두기까지 70일 남짓 걸린다. 씨앗은 15도에서 34도 사이에서 싹이 트지만 잘 자라는 온도는 17도에서 23도이다. 늦더위 속에 심어 서늘해지는 가을에 뿌리를 굵히는 시기이다. 너무 일찍 넣으면 고온으로 시들음병과 바이러스병이 오기 쉽고, 너무 늦으면 12도 이하의 저온을 일주일 넘게 겪으면서 꽃대가 올라와 뿌리를 쓰지 못한다. 파종 시기의 앞뒤 폭이 좁은 작물이다.
배추는 지난 입추 무렵 씨를 넣었다면 지금쯤 본잎이 서너 장 나 있을 것이다. 파종 후 20일에서 25일, 본잎 3~4매가 아주심기 적기이다. 중부지방은 8월 하순에서 9월 상순 사이에 옮겨 심는다. 이랑 너비는 60~65cm, 포기 사이는 30~35cm를 둔다. 권하는 시기보다 일찍 심으면 늦더위로 생리장애가 오고, 늦으면 속이 찰 시간이 모자란다. 옮겨 심는 날은 흐린 날 오후를 고르고, 심은 뒤 사나흘은 물을 자주 준다.
가을 잎채소도 이 무렵에 씨를 넣는다. 상추, 시금치, 갓, 열무, 쪽파가 모두 해당한다. 다만 상추와 시금치처럼 서늘한 것을 좋아하는 씨앗은 늦더위에 발아가 잘 되지 않는다. 파종 뒤 마른 풀을 얇게 덮어 흙 온도를 낮추고 마르지 않게 해주어야 싹이 고르게 나온다.
여름 열매채소는 정리 판단이 필요하다. 오이와 애호박은 잎에 흰 가루가 끼고 열매가 굽거나 잘아지면 뒷심이 다한 것이니 거두어내고 자리를 비운다. 고추, 가지, 토마토는 서리 내리기 전까지 열매를 다니 그대로 두되, 아래쪽 묵은 잎과 병든 잎은 훑어낸다. 비운 자리는 김장 채소 이랑으로 이어 쓴다.
해충은 초기 열흘이 고비이다. 무와 배추가 속한 십자화과에는 벼룩잎벌레와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어김없이 찾아온다. 특히 벼룩잎벌레는 떡잎에 좁쌀만 한 구멍을 촘촘히 뚫는데, 어릴 때 잎을 잃으면 뿌리가 굵지 못한다. 파종 직후부터 한랭사를 씌워 터널을 만들어두면 이 시기를 넘기기가 한결 수월하다. 배추흰나비 알과 애벌레는 잎 뒷면을 살펴 손으로 걷어내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올여름은 북태평양고기압에 티베트고기압까지 겹치면서 폭염과 열대야가 유난히 길게 이어졌다. 처서를 지나면 더위가 한풀 꺾인다는 말도 요즘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 기상청은 팔월 하순까지 이 더위가 세력을 유지하다가 그 뒤에 가을장마가 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태풍도 여러 개가 생겼지만 대부분 우리나라를 비껴가면서 남부지방에는 가뭄이 들었다. 그러니 텃밭에서 할 일은 분명하다. 첫째, 파종한 자리는 마르지 않게 지킨다. 씨를 넣고 마른 풀을 얇게 덮은 뒤 아침저녁으로 물을 준다. 늦더위에는 흙 표면이 반나절이면 마른다. 둘째, 발아가 고르지 않으면 곧바로 보파한다. 고온에 싹이 듬성듬성 나면 사나흘 기다렸다가 빈자리에 씨를 다시 넣는다. 여기서 열흘을 넘기면 추대 위험이 커진다. 셋째, 늦더위 뒤에 올 가을장마와 태풍을 미리 대비한다. 고랑의 물길을 손보고, 여름내 헐거워진 고추와 가지의 지주를 다시 묶는다. 키를 다 키운 작물일수록 바람에 약하다.
처서, 텃밭에서 할 일
김장무 씨 넣기: 흙을 30cm 깊이로 부드럽게 고른 뒤 25~30cm 간격으로 한 자리에 서너 알씩 넣고 흙을 1.5~2cm 덮는다. 물을 흠뻑 주고 마른 풀을 얇게 덮는다.
배추 아주심기: 본잎 3~4매가 된 모종을 흐린 날 오후에 옮겨 심는다. 포기 사이는 30~35cm를 둔다.
가을 잎채소 파종: 상추, 시금치, 갓, 열무 씨를 넣는다. 상추 씨앗은 미리 저온 처리를 해두면 발아가 훨씬 고르다.
가을당근 솎기: 대서에 뿌린 당근이 본잎을 냈다면 두 번째 솎기를 해 포기 사이를 10cm로 벌린다. 솎아낸 잎은 샐러드에 넣는다.
쪽파 물주기: 입추에 심은 쪽파가 싹을 올렸다. 늦더위에 마르지 않도록 살피고, 웃거름은 자라는 동안 나누어 준다.
붉은 고추 따 말리기: 붉게 익은 것부터 따서 볕에 말린다. 밤이슬을 맞히면 곰팡이가 슬고 색이 죽으니 저녁에는 거두어 들인다.
여름 열매채소 정리: 오이와 애호박은 뒷심이 다했으면 걷어내고 자리를 비운다. 걷어낸 덩굴은 잘라 멀칭재로 쓴다.
씨앗 갈무리: 갓, 들깨, 상추 등 꽃대가 올라 갈색으로 익은 씨앗을 받아 그늘에서 말린다. 봉지에 담아 서늘한 곳에 두면 이듬해 종자가 된다.
십자화과 해충 잡기: 무와 배추 떡잎에 구멍이 나기 시작하면 벼룩잎벌레이다. 한랭사를 씌우거나 마늘·고추 달인 물을 잎 뒤까지 뿌린다. 배추흰나비 알은 손으로 걷어낸다.
지주와 물길 점검: 여름내 헐거워진 지주를 다시 묶고, 고랑에 물 빠질 길을 터둔다. 태풍과 가을장마 대비이다.
멀칭 보강: 새로 만든 이랑과 비운 자리에 마른 풀을 덮는다. 흙 온도를 낮추고 늦더위에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막는다.
마지막 큰 풀매기: 풀의 기세가 꺾이는 지금이 한 해 마지막으로 크게 풀을 정리할 때이다. 뽑기보다 베어 눕혀 그 자리에 둔다.
늦더위에 씨를 넣는 두 작물 — 무와 가을상추
처서에 밭에 들어가는 씨앗은 여럿이지만, 무와 상추를 나란히 놓고 보면 배울 것이 많다. 하나는 땅속에서 굵어지고 하나는 땅 위에서 벌어진다. 하나는 늦더위에도 거뜬히 싹을 틔우고, 하나는 그 더위에 잠들어 버린다. 같은 날 같은 밭에 넣는 씨앗인데 성질이 이렇게 다르다.

무, 흙이 만들어주는 작물
무는 뿌리를 먹는 작물이니 흙이 곧 수확이다. 씨앗을 넣기 전에 흙을 30cm 깊이까지 부드럽게 풀어주고 돌멩이와 덩어리를 골라낸다. 뿌리가 자라다 돌을 만나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가랑이무가 되고, 덜 삭은 거름 덩어리에 닿아도 마찬가지다. 당근을 두고 흙을 깊이 풀어주는 것이 재배의 절반이라 했는데, 무도 다르지 않다. 거름은 파종 서너 주 전에 잘 삭은 것으로 미리 넣어 흙과 섞어둔다.
무는 흙 산도를 꽤 가린다. 알맞은 산도는 pH 5.5에서 6.8 사이인데, 오래 묵은 텃밭 흙은 대개 이보다 산성으로 기울어 있다. 산성이 심하면 뿌리혹병이 오기 쉽다. 쪽파와 무가 좋아하는 산도가 비슷하니 한 번에 다뤄도 된다. 5평 텃밭이라면 한 평에 소석회나 고토석회를 300~600g 남짓, 밭 전체로는 1.5~3kg 정도가 기준이다. 다만 이것은 산성으로 기운 흙을 손볼 때의 이야기이고, 해마다 습관처럼 넣을 것은 아니다. 흙이 이미 중성에 가까우면 오히려 탈이 난다. 넣는 시기도 중요하다. 석회와 거름은 이삼 주 간격을 두고 따로 넣는다. 한꺼번에 섞으면 거름의 질소가 날아가버려 둘 다 손해다. 석회를 먼저 뿌려 흙과 섞고, 이삼 주 뒤에 퇴비를 넣는 순서가 무난하다.
씨앗은 25~30cm 간격으로 한 자리에 서너 알씩 넣는다. 무는 곧은 뿌리가 아래로 내려가는 작물이라 옮겨 심을 수 없다. 그러니 처음부터 자랄 자리에 넣어야 한다. 싹이 나면 두 번 솎는다. 본잎이 두세 장일 때 튼실한 것 두 포기만 남기고, 대여섯 장일 때 한 포기만 남긴다. 아까워서 그냥 두면 뿌리가 서로 밀려 모두 잘아진다. 솎아낸 어린 무는 그대로 열무이다. 뿌리째 뽑아 겉절이를 하거나 국에 넣으면 김장 전에 맛보는 첫 수확이 된다.
무의 이웃으로는 십자화과가 아닌 작물을 붙이는 것이 좋다. 국내 유기농업 연구에서는 배추 곁에 겨자류와 쑥갓 같은 작물을 섞어 심어 해충 발생을 줄인 결과가 보고되었다. 겨자와 갓은 벌레가 더 좋아하는 작물이라 밭 가장자리에 한 줄 심어두면 벌레를 그쪽으로 불러 모으고, 쑥갓처럼 향이 있는 국화과 작물은 곁에 두면 벌레의 접근을 줄인다. 입추 편에서 배추를 두고 나눈 이야기가 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메리골드를 이랑 끝에 두르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돌려짓기도 다시 짚어둔다. 무는 배추, 갓, 열무, 순무와 모두 한 식구이다. 지난가을 김장 채소가 섰던 자리에 다시 무를 넣으면 이어짓기나 마찬가지가 된다. 5평 안에서 자리를 돌리기가 쉽지 않지만, 최소한 작년 김장 이랑만은 피해주는 것이 좋다.
가을상추, 더위에 잠드는 씨앗
상추는 봄에 밭을 채웠고, 소만 무렵 꽃대를 올렸으며, 망종에는 뿌리째 뽑혀 콩과 당근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가 가을에 돌아온다.

가을 상추의 첫 관문은 발아이다. 상추 씨앗이 잘 트는 온도는 15도에서 20도 사이이다. 25도를 넘으면 발아율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30도가 넘는 곳에 오래 두면 씨앗이 아예 잠에 빠져 싹을 틔우지 않는다. 처서 무렵의 늦더위가 딱 그 온도이다. 봄에는 아무렇게나 뿌려도 잘 나던 씨앗이 가을에는 감감무소식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결법은 씨앗을 미리 서늘하게 재우는 것이다. 씨앗을 반나절쯤 물에 불린 다음, 물기를 짜지 않은 축축한 수건에 싸서 냉장실에 이삼 일 둔다. 그러면 잠에서 깨어 파종 후 이삼 일이면 싹이 올라온다. 약을 쓰지 않고도 물과 온도만으로 되는 일이다. 파종할 때는 씨앗을 깊이 묻지 않는다. 상추는 빛을 받아야 싹이 트는 씨앗이라 흙을 아주 얇게 덮거나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러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대신 마른 풀을 살짝 덮어 흙이 마르지 않게 해준다.
가을 상추는 봄 상추보다 맛있다. 옛말에도 "가을 상추는 문 걸어 잠그고 먹는다"고 했다. 특별히 맛이 좋다는 뜻이다. 이유는 온도에 있다. 상추는 더우면 꽃대를 올리려 하고, 그때 잎에 쓴 물질이 늘어난다. 봄에 심은 상추가 오뉴월로 접어들며 억세지고 쓴맛이 나는 것이 그래서다. 반대로 가을 상추는 자랄수록 날이 서늘해지니 꽃대를 올릴 일이 없다. 끝까지 부드럽고 단맛이 남는다. 물이 모자라도 쓴맛이 강해지니, 늦더위가 남은 초기에는 물을 넉넉히 주는 것이 좋다.
상추는 무의 좋은 이웃이기도 하다. 상추는 국화과, 무는 십자화과라 서로 불러들이는 벌레가 다르다. 한 이랑에 섞어 심으면 한쪽 벌레가 밭 전체로 번지기 어렵다. 자라는 방향도 어긋난다. 무는 아래로 내려가고 상추는 옆으로 벌어지니, 땅속과 땅 위를 나누어 쓴다. 무 이랑 사이사이 빈틈에 상추를 앉히면 5평을 한 뼘도 놀리지 않게 된다. 상추는 잎을 아래에서부터 훑어 따면 위에서 새잎이 계속 나오니, 무를 거두는 늦가을까지 밥상에 오른다.
더위에 강한 씨앗과 더위에 잠드는 씨앗을 같은 날 같은 밭에 넣는다. 하나는 그냥 뿌리면 되고, 하나는 며칠 재웠다 뿌려야 한다. 작물마다 다루는 법이 다르다는 것을 이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짝이 드물다. 밭일이 손에 익는다는 건 결국 이 차이를 하나씩 알아가는 일이다. 자연은 모든 것에 같은 방법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음 연재에서는 흰 이슬이 맺힌다는 절기, 백로(白露)의 텃밭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