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농업/도시농부들

[소자농의 자연농사] 씨앗이 나를 키웠다 — 토종씨앗과 함께한 10년

아메바!(김충기) 2026. 6. 24. 11:42

[소자농의 자연농사] 씨앗이 나를 키웠다 — 토종씨앗과 함께한 10년

토종씨앗으로 도시농사를 시작한 지 어느덧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씨앗이 그저 신비로웠습니다. 작은 알 하나에 수백 년의 시간이 담겨 있는 것 같았고, 이름조차 생소한 작물을 만날 때마다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설레었거든요.

 

지금은 다릅니다.

상추, 배추, 아욱은 물론이고 깨, 들기름, 마늘, 양파, 파, 생강까지 — 집에서 먹는 것들을 스스로 길러 자급하면서 씨앗을 받는 일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가을에 받고, 봄에 다시 심고, 남는 씨앗은 이웃과 나누는 일이 숨 쉬듯 당연해졌어요.

그렇게 10년을 살다 보니,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주색 감자에서 분홍이 돋았다

작년 일이었습니다. 토종 자주감자를 수확하는데, 알 하나가 달랐어요. 자주색과 분홍색이 얼룩진 감자가 나온 겁니다. 자연변이였습니다.

그냥 먹어버릴 수도 있었죠. 그런데 저는 그 감자를 겨우내 보관했다가 올봄, 색깔별로 씨눈을 살펴 쪼개 심었습니다. 수확해보니 얼룩감자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원래의 토종 자주감자와, 그 변이종에서 나온 분홍감자, 둘이 따로 자리를 잡았어요.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우리 토종씨앗이 이렇게 이어져 온 거구나. 흉년과 전쟁을 버티면서, 이름 모를 농부들이 딱 이렇게 — 달라진 알 하나를 눈여겨보고, 쪼개 심고, 지켜보면서 — 작물의 다양성을 만들어온 거구나.

씨앗은 이미 완성된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변하고 있거든요. 그 변화를 알아보고 살려내는 게 농부의 일이었습니다.

 

씨앗 뒤에는 농부가 있다

예전에는 씨앗 자체에만 눈이 갔습니다. 지금은 씨앗을 보면 먼저 그것을 이어온 손이 떠오릅니다.

전기도, 농약도, 제대로 된 저장 시설도 없던 시절. 흉년이 들어도, 전쟁이 나도, 씨앗만은 품 안에 넣고 지켜낸 사람들. 한 알의 씨앗은 단순한 종자가 아닙니다. 수많은 농부들의 인내가 눌러 담긴 유산이에요.

 

같은 아욱도 저마다 다른 얼굴

처음에는 아욱이면 다 같은 아욱인 줄 알았습니다.

씨앗을 모으고 나누다 보니 강원도 아욱, 전라도 아욱, 경상도 아욱이 저마다 달랐어요. 잎 크기, 색깔, 성장 속도, 맛까지. 그 차이 안에 그 땅의 기후가 들어 있고,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이 들어 있었습니다. 토종씨앗은 식물이면서 동시에 지역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아욱국을 끓이면서 조선시대 백성들도 이걸 끓여 먹었을까 생각하게 되고, 토종콩을 수확하면서 고조선 사람들도 콩을 먹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씨앗을 심는 일이 어느새 우리 민족의 식문화를 공부하는 일이 되어 있었어요.

 

씨앗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

씨앗 한 봉지를 받으면 수백 배, 수천 배로 늘어납니다. 그러니 쌓아두는 것보다 나눌 때 가치가 커지죠.

처음에는 저도 받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건네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내년에 심어보세요."

그 한마디와 함께 씨앗 한 줌을 나누는 순간, 농사는 생산을 넘어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씨앗을 나누는 건 결국 이 땅 작물의 다양성을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텃밭은 나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풀이 나면 뽑아야 하고, 벌레가 보이면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토종농사를 오래 하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토마토 옆에 바질이 자라고, 고추 사이에 상추가 자라고, 이름 모를 풀이 꽃을 피우면 벌과 나비가 찾아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알게 됐어요. 텃밭은 내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농부도, 풀도, 곤충도, 새도 저마다 역할이 있는 주인이라는 것을.

생명은 경쟁만 하는 게 아닙니다. 서로 기대어 삽니다. 그걸 작은 텃밭에서 배웠거든요.

 

채소를 기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처음에 도시농업을 시작한 건 그냥 채소를 먹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압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씨앗을 나누고, 수확물을 이웃과 나누고, 함께 농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고, 잊혀가던 것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달의 차고 기우는 모습을 살피고, 절기에 씨를 뿌리고,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던 옛 농부들의 지혜 — 토종씨앗이 저를 그 교실로 데려다준 셈이에요.

 

씨앗이 나를 키웠다

10년 동안 토종씨앗을 길러왔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씨앗을 키운 게 아니었어요. 씨앗이 저를 키워준 겁니다. 봄이면 싹이 되고, 여름이면 꽃이 되고, 가을이면 다시 씨앗이 되는 그 순환을 지켜보면서, 사람의 마음도 조금씩 깊어지거든요.

 

오늘도 지난해 받은 씨앗을 심습니다.

 

그리고 그 자주감자 옆에 분홍감자를 나란히 심으면서 — 내년에 또 어떤 변이가 나올지, 기다립니다.

 

자주감자와 분홍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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