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하지] 가장 긴 낮, 가장 바쁜 손
[제10화: 하지] 가장 긴 낮, 가장 바쁜 손
도시 텃밭, 빛의 절정에서 흙을 지키다

해가 좀처럼 지지 않는다.
저녁 일곱 시가 넘었는데도 텃밭에는 아직 빛이 남아 있다. 일을 마치고 나와도 한참을 더 손볼 수 있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 하지(夏至)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해는 다시 조금씩 짧아지기 시작한다. 자연의 모든 절정이 그렇듯이, 가장 환한 정점에서 이미 기우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밭에서 가장 먼저 손이 가는 일은 감자를 캐는 일이다. 봄에 심은 감자가 땅속에서 알이 다 굵었다. 잎과 줄기가 누렇게 시들기 시작하면 그것이 캐라는 신호이다. 흙을 살살 헤치면 흙빛과 똑같은 감자알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한 해 농사 중 가장 손맛 좋은 순간이다. 그래서 봄에 심어 이맘때 캐는 감자를 '하지감자'라 부른다. 품종이 아니라 시기에 따른 호칭이다.
절기 이야기: 가장 환한 날, 그늘을 생각하다
하지(夏至)는 24절기 중 열 번째 절기로, 양력 6월 21일 무렵에 든다. 한자를 풀면 '여름 하(夏)'에 '이를 지(至)', 여름의 한가운데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더 정확히는 해가 하늘에서 가장 높이 올라 낮의 길이가 한 해 중 가장 긴 날이다. 북반구가 태양을 향해 가장 많이 기울어진 날, 그날이 하지이다.
하지를 둘러싼 옛이야기는 대개 비를 기다리는 마음과 닿아 있다. 모를 내야 하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농부의 속은 새까맣게 탔다. "하지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잔다"는 말이 그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가 지나면 장마가 시작되니, 논에 물 들고 나는 것을 한시도 놓을 수 없어 물꼬 곁에 발을 담근 채 잠을 청했다는 뜻이다. "하지 안에 심은 고구마는 침만 발라도 산다"는 말도 있다. 하지 전에만 심으면 고구마가 워낙 잘 뿌리내려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는, 제 때 심는 일의 중요함을 일러주는 말이다.
하지에 비 오기를 비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것도 같은 이유였다. 모내기철 가뭄은 한 해 농사 전체를 흔드는 일이었으니, 마을이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를 빌었다. 가장 환한 날에 사람들은 오히려 그늘과 물을 생각했다.
농사 이야기: 캐고 나서, 비를 맞이하다
하지의 텃밭은 거두는 일과 대비하는 일이 한자리에 겹친다.
망종 무렵 콩을 심고 당근 떡잎을 살피던 손길이, 하지에 이르면 땅속 작물을 캐는 일로 옮겨간다. 캐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봄에 심은 감자가 알을 굵혔고, 지난가을에 심어 겨울을 난 마늘도 잎이 누렇게 시들며 캐라는 신호를 보낸다. 줄기에 매달린 강낭콩 꼬투리도 통통하게 여물었다. 그런데 이 작물들을 캐는 데에는 한 가지 공통된 시간의 약속이 있다. 장마가 오기 전에 거둬야 한다는 것이다. 땅속에 알이 다 들었어도, 비에 흙이 흠뻑 젖은 상태에서 캐면 흙이 들러붙고 상처 난 자리로 물이 스며 쉽게 썩는다. 그래서 하늘을 살펴야 한다. 비 소식이 없는 맑은 날, 흙이 보송할 때 거두는 것이 가장 좋다.
봄 잎채소가 물러나고 감자까지 캐고 나면, 5평 텃밭에는 제법 너른 빈자리가 생긴다. 전통 농가라면 이 자리를 잠시 비워 흙을 쉬게 했다. 가을 김장 채소를 들이기 전 땅에게 주는 휴식이다. 하지만 작은 도시 텃밭에서는 그 빈자리에 자라는 기간이 짧은 작물을 들여 한여름까지 수확을 이어갈 수 있다.
한편으로 입하에 심은 토마토와 고추는 이제 한창 열매를 달기 시작하고, 망종에 심은 콩은 떡잎을 지나 본잎을 내밀고 있다. 거두는 작물과 자라는 작물이 한 밭에서 동시에 움직인다. 그 사이에서 농부가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다가올 장마이다.
장마는 텃밭에 두 얼굴이다. 메마른 흙을 적셔주는 고마운 비이면서, 동시에 흙을 두드려 단단하게 다지고 작물의 뿌리를 물에 잠기게 하는 위협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가 쏟아지기 전에 흙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멀칭을 두텁게 깔아 빗방울이 흙을 직접 때리지 못하게 막고, 물길을 미리 터서 고인 물이 빠질 길을 내준다. 살아있는 흙은 빗물을 머금되 잠기지 않는다. 결국 하지의 가장 중요한 일은 흙을 살아있게 두는 것이다.

하지에 텃밭에서 할 일
- 감자 수확: 잎과 줄기가 누렇게 시들면 수확할 때이다. 비 소식이 없는 맑은 날, 흙이 보송할 때 캔다. 캐기 일주일쯤 전부터 물 주기를 멈추면 흙이 마르고 저장성이 좋아진다. 호미로 포기에서 한 뼘쯤 떨어진 바깥을 파고 들어가야 알을 찍지 않는다.
- 마늘 수확: 잎이 절반 넘게 누렇게 마르면 캔다. 장마가 오기 전 비 소식 없는 날을 골라야 한다. 캔 마늘은 밭에서 이삼 일 말리되, 강한 볕에 그대로 두면 데니 마늘잎으로 덮어 가려준다. 잘 말린 한지형 마늘은 이듬해 봄까지 두고 먹을 수 있다.
- 강낭콩 거두기: 꼬투리가 통통하게 여물면 장마 들기 전에 딴다. 비에 젖으면 꼬투리 속에서 콩이 무르거나 싹이 트기 쉽다.
- 빈자리에 짧은작물·늦콩 들이기: 감자와 마늘을 캔 자리, 새가 파먹어 빈 자리, 이곳저곳 자투리 공간에 늦콩을 점뿌림한다. 들깨용 모종도 빈자리에 옮겨 심는다. 열무, 얼갈이배추처럼 한 달이면 거두는 작물 씨앗을 흩어 뿌리면 한여름 푸성귀가 끊이지 않는다.
- 씨쪽파 갈무리: 작년에 심어 겨울을 난 쪽파가 시들해지면 뿌리를 캐내 그늘에 말려 씨로 갈무리해 둔다. 가을에 다시 심을 씨앗이 된다.
- 고추 윗단 줄 매기: 고추가 자랄수록 무거운 열매에 줄기가 쓰러지기 쉽다. 자람에 따라 10~15cm 간격으로 윗단 줄을 계속 매어 올려 쓰러짐을 막는다.
- 멀칭 보강: 마른 풀, 베어낸 잡초, 감자 줄기까지 작물 사이에 두툼하게 덮는다. 흙 온도를 낮추고 수분 증발을 막으며, 쏟아지는 빗방울로부터 흙 표면을 지킨다.
- 물길 내기와 장마 대비 풀매기: 이랑과 고랑을 점검해 물 빠질 길을 터둔다. 낮은 곳에 물이 고이면 뿌리가 숨을 못 쉰다. 풀도 장마 들기 전에 미리 매어둔다. 비가 한번 쏟아지면 풀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니, 뽑기보다 베어 눕혀 흙을 덜 다치게 한다.
- 아침 물 주기: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물은 해가 뜨겁기 전 이른 아침에 흠뻑 준다. 한낮에 주면 금세 증발하고, 저녁에 잎이 젖은 채 밤을 나면 곰팡이병이 생기기 쉽다.
- 진딧물·노린재 살피기: 더위와 함께 해충도 늘어난다. 잎 뒷면을 살피고, 마늘·고추 달인 물이나 목초액을 잎 뒤까지 골고루 뿌린다. 고추는 수확 뒤 목초액을 뿌려 소독해 두면 좋다. 노린재는 이슬 맺힌 이른 아침에 손으로 잡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땅속에서 거두는 두 작물 — 감자와 마늘
하지의 텃밭에서 가장 바쁜 손은 땅속을 향한다. 봄 내내 자란 감자와, 지난가을에 심어 겨울을 견딘 마늘이 같은 시기에 캐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하나는 한 철 만에, 하나는 한 해를 꼬박 걸려 알을 굵힌 작물이다. 자란 시간은 다르지만 거두는 때는 같다. 그 둘을 나란히 캐는 절기, 그것이 하지이다.
감자, 서늘함을 좋아하는 작물
감자는 서늘한 것을 좋아하는 작물이다. 봄의 선선함 속에서 잎을 키우고, 더위가 닥치기 전 땅속에 알을 묻어둔다. 그래서 봄에 심어 하지 무렵에 캔다. 더 두면 땅속 온도가 올라 알이 무르고 썩기 쉽다. 캐는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감자 농사의 마지막 관문이다.
감자를 캘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이다. 비에 젖은 흙에서 캔 감자는 저장 중에 쉽게 썩는다. 캐기 일주일 전부터 물 주기를 멈춰 흙을 말리고, 비 소식 없는 맑은 날을 골라 캔다. 캔 뒤에는 곧장 씻지 않는다. 흙이 묻은 채 그늘에서 하루 이틀 말리면 표면의 잔상처가 아물어 한결 오래간다. 햇빛은 금물이다. 빛을 받은 감자는 껍질이 푸르게 변하면서 솔라닌이라는 독성 물질을 만든다. 그래서 보관도 반드시 빛이 들지 않는 서늘한 곳에 해야 한다.
감자는 같은 자리에 이어 심으면 병이 도지는 작물이다. 특히 토마토, 가지, 고추와는 한 식구(가짓과)라 같은 병을 주고받는다. 감자를 캔 자리에 가을에 토마토나 가지를 들이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다. 대신 콩이나 잎채소처럼 다른 식구의 작물로 자리를 바꿔주면 흙도 병도 한숨 돌린다. 망종에 심은 콩이 흙에 질소를 채워두었다면, 그 옆자리는 더없이 좋다. 콩이 살려둔 흙이 이듬해 농사를 살찌운다.
감자를 캔 빈자리는 한여름 텃밭의 귀한 공간이다. 열무나 얼갈이배추처럼 한 두달이면 거두는 작물을 흩어 뿌리거나, 더위를 반기는 생강 같은 작물을 들여도 좋다. 한 작물이 끝난 자리를 다른 작물이 곧바로 채우는 것, 흙을 잠시도 헐벗게 두지 않는 것이 작은 텃밭의 지혜이다.

마늘, 한 해를 걸려 여무는 작물
마늘은 인내의 작물이다. 지난 가을 땅에 묻혀 매서운 겨울을 견디고, 봄 햇살에 잎을 키워, 하지 무렵에야 비로소 통을 굵힌다. 심고 캐기까지 꼬박 여덟아홉 달. 텃밭에서 가장 오래 땅을 차지하는 작물이지만, 그만큼 손이 적게 가고 병충해에도 강하다. 느리지만 듬직한 작물이다.
중부 내륙에서 기르는 한지형 마늘, 흔히 알이 여섯 쪽으로 도톰하게 박힌 육쪽마늘은 6월 중하순, 바로 하지 무렵이 수확기이다. 잎이 절반 넘게 누렇게 마르면 캐라는 신호이다. 감자와 마찬가지로 장마가 닥치기 전, 흙이 마른 맑은 날에 캐야 한다. 캔 마늘은 밭에서 이삼 일 말리되 강한 볕에 데지 않도록 마늘잎으로 덮어 가려주고, 바람 잘 통하는 그늘에서 차분히 건조한다. 수분이 잘 빠진 한지형 마늘은 저장성이 뛰어나 이듬해 봄까지 두고 먹을 수 있다.
마늘은 그 자체로 텃밭의 지킴이 역할을 한다. 뿌리와 잎에서 나는 강한 향과 천연 항균 물질이 진딧물과 응애 같은 해충을 쫓고 흙 속 병원균을 억누른다. 그래서 토마토나 상추, 딸기 곁에 마늘을 몇 포기 섞어 심으면 이웃 작물의 병을 줄여주는 든든한 동반자가 된다. 마늘을 우려낸 물을 잎에 뿌려 천연 기피제로 쓰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다만 마늘이 모든 작물과 잘 지내는 것은 아니다. 콩이나 완두 같은 콩과 작물 곁에는 마늘을 두지 않는 편이 좋다. 마늘이 내뿜는 항균 물질이 콩 뿌리에 깃들어 질소를 끌어모으는 뿌리혹박테리아의 활동까지 억눌러 버리기 때문이다. 흙을 살리려 심은 콩의 힘을 마늘이 막는 셈이다. 망종 편에서 콩 곁에 파를 심지 말라던 이야기와 같은 이유이다. 파와 마늘은 한 식구(파속)이니, 그 성질도 닮았다.

다음 연재에서는 작은 더위라는 이름의 절기, 소서(小暑)의 텃밭으로 이어진다. 장마가 한창인 텃밭에서 빗물을 어떻게 다스리고, 눅눅한 습기 속에서 작물의 병을 어떻게 막아내는지, 그리고 비 그친 사이 폭발적으로 자라는 풀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지를 함께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