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자농의 자연농사] 선비콩 한 그릇

[소자농의 자연농사] 선비콩 한 그릇 — 조선 선비가 먹던 콩을 아들이 먹었다
마른 선비콩을 물에 불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두유제조기에 넣고 갈았어요. 콩국수를 해서 아들 앞에 놓았더니 한 그릇을 다 비웠습니다. "맛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요.
선비콩은 그런 콩입니다. 불리지 않아도 됩니다. 오래 공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씁니다.
조선 선비의 이름을 얻은 콩
선비콩은 오래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 〈본리지〉에 이런 기록이 있거든요.
"黃皮臍左右有黑點者 名儒執"
누런 껍질에 배꼽 좌우로 검은 점이 있는 것을 유집(儒執)이라 한다는 뜻입니다. 유집, 선비가 쥔다는 말이죠. 이 기록이 수백 년을 건너 지금 이 콩알 한 줌과 연결됩니다. 실제로 선비콩 종자를 들여다보면 딱 그렇습니다. 배꼽 양옆에 검은 점 또는 자주색 반점이 또렷하게 찍혀 있어요.
척박한 땅, 작은 콩
선비콩은 메주콩보다 알이 좀 작습니다. 단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작고 단단한 것이 오히려 강점이에요. 비옥하지 않은 땅에서도 그냥 자랍니다. 비료를 많이 넣지 않아도, 물이 넉넉하지 않아도 버팁니다.
오랜 세월 우리 농부들이 이 콩을 재배해온 건 그냥이 아닙니다. 살아남는 콩이었으니까요. 수확 후에도 오래 보관됩니다. 실용적인 식량이었습니다.
불리지 않아도 되는 밥콩
일반 콩은 전날 밤부터 물에 불려야 합니다. 선비콩은 다릅니다. 마른 콩 그대로 쌀에 섞어서 밥을 지을 수 있어요. 농번기에 바쁜 농가에서 그게 얼마나 편한 일이었을지, 생각해보면 짐작이 됩니다.
밥을 지으면 고소한 향이 올라옵니다. 씹으면 쫄깃합니다. 씹을수록 맛이 납니다.

된장도 좋고, 메주도 좋다
선비콩은 메주를 쑬 때도 좋습니다. 오래 불리지 않아도 잘 삶아지고, 메주를 빚으면 발효가 고르게 됩니다. 된장을 담그면 강하거나 거칠지 않습니다. 은은하고 구수합니다. 오래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에요.
그래서 밥콩으로도, 메주콩으로도 쓰였습니다. 어디 하나에만 쓰는 콩이 아니었습니다.



씨앗 한 알이 품은 것
현대의 개량콩은 수량이 많고 기계로 수확하기 좋습니다. 선비콩은 그쪽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오래 두어도 썩지 않고, 발효하면 깊은 맛이 나고, 메마른 땅에서도 자라는 쪽으로 수백 년을 버텼습니다.
토종 씨앗을 심는다는 게 뭔지 가끔 스스로 묻게 됩니다. 옛것을 보존한다는 거창한 말 말고요. 그냥 이 씨앗이 버텨온 방식을 내 밭에서 한 번 더 이어가는 것, 그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마른 콩을 갈아 아들한테 한 그릇 먹였습니다. 조선 선비의 이름을 가진 콩이 2025년 여름 점심상에 올랐습니다. 아들은 다 먹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