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잠깐 흙이 아닐 뿐 - 『흙의 숨』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고대 그리스는 물, 불, 흙, 공기가 만물을 이루는 기본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소설은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물질관을 지배한 이론이다. 동아시아는 오행이라 불리는 물, 불, 흙, 나무, 쇠로 우주만물을 설명하려고 했다. 음양오행은 집을 짓는 방법부터 개인의 팔자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기본철학이자 우주관을 규정지었다. 네 가지 원소와 오행을 놓고 볼 때 물, 불, 흙 세 가지가 겹친다. 현대 과학의 발달로 세상을 이루는 기본 요소가 원자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동양과 서양 양쪽에서 물, 불, 흙을 세상의 근본으로 여기며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삶에 가장 가까운 것은 흙
물과 불, 흙이 모두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인간의 삶에 가장 가까운 것은 흙이다. 물과 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흙은 생명 유지뿐 아니라 인간의 삶 그 자체에 관여한다. 예로부터 인간은 흙 위에서 살고, 흙을 일구어 먹을 것을 마련하고, 흙 속에 묻혀 삶을 마무리했다. 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삶이 이보다 복잡해지고 흙이 아닌 다른 방식도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흙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흙을 바라보는 열 가지 관점
『흙의 숨』은 인간과 연루된 흙을 열 가지 관점에서 바라본다. ‘똥’, ‘화전’, ‘쟁기’, ‘논’은 흙으로부터 인간의 먹거리를 만드는 농업에 대한 이야기다. ‘물’은 흙을 이루는 주요 구성요소이며, ‘강’은 흙을 옮기고 쌓는다. ‘지렁이’는 유기물이 풍부한 흙을 만든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흙을 죽이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흙의 몸’은 우리가 좀처럼 보기 힘든, 지구의 중심으로 이어지는 수직의 흙이다. ‘흙의 숨’은 들숨과 날숨을 쉬는 흙의 호흡을 통해 흙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책의 마지막 장인 ‘땅’은 수평의 흙으로, 인간이 발 딛고 살다가 결국 돌아갈 곳이기도 하다.


흙은 뒤죽박죽이라 재밌다
작가는 흙이 뒤죽박죽이라 재미있다고 말한다. 흙의 반은 암석 조각, 모래, 점토 등 무기물과 박테리아나 세균 같은 유기물이 섞여 있고, 나머지 반은 물 반 공기 반으로 이루어져 온도와 기후에 따라 성질이 변한다. 흙은 생성된 시간대도 마구잡이로 섞여 있다. 수십만 년 된 오래된 흙이 지각변동으로 솟아오르기도 하고, 낙엽이 썩거나 지렁이의 내장을 통과하며 만들어진 보슬보슬한 새 흙이 스며들기도 한다. 흙은 수많은 존재가 함께 모여 사는 곳이라 그 자체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다. 흙 속에서 생물과 무생물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면 지구 생태계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상호 의존하는 것과 닮아 있다.
다양한 흙만큼 인간의 활동도 지역마다 다른 영향을 준다
책의 저자인 유경수는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의 토양학과 교수다. 그는 한국인이지만 세계 곳곳을 다니며 다양한 흙과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책 속에 녹여냈다. 흙은 북극에 가까운 툰드라 지역부터 적도를 지나 아마존 밀림에 이르기까지 지구 곳곳을 누빈다. 흙의 성질이 다른 만큼이나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다르다. 어떤 곳에서 기후 위기를 불러오는 아찔한 모습이 다른 곳에서는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활동이 되기도 한다.
인도 나갈랜드 열대림의 화전은 작물을 위해 필수적이다
서구에서는 개발도상국의 화전이 지구에 산소를 공급하는 나무를 태우고 땅을 망친다고 말하지만, 인도 나갈랜드 열대림의 화전은 양분이 나무에서 작물로 옮겨지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유기물의 분해가 빠른 열대림에서는 나뭇재가 흙에 양분을 주고 토양의 산성화를 막는 작용을 한다. 화전은 길어야 1~2년 작물을 재배하고 이후 수십 년은 다시 숲이 된다. 작가는 예전부터 이어온 인간의 활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기술보다 오래된 방식이 지역의 생태에 더 잘 맞는 방식일 수도 있다. 기후 위기가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세상이지만 모두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지구는 다양한 생태가 있는 만큼 그에 맞는 활동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역에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나갈랜드의 농민들은 화전의 필요성을 정부 관계자와 생태학 관련 학자들에게 이해시키는 방법을 택했고 공감과 이해를 받고 있다.
극지에서 낚시용으로 팔리는 지렁이가 문제다
생태에 도움을 주는 존재가 다른 곳으로 옮겨져서 큰 피해를 끼치기도 한다. 극지인 스웨덴에 낚시용으로 팔리는 지렁이가 문제다. 지렁이는 음식물쓰레기를 유기물이 풍부한 흙으로 만들어준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울 정도지만, 스웨덴처럼 추운 지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극지에서는 자연의 순환이 우리나라 같은 온대보다 훨씬 느리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낙엽이 토양의 유실을 보호해 왔는데, 지렁이는 쌓인 낙엽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수십 년 된 흙 속의 유기물까지 모조리 몸속에 넣어버린다. 흙에 사는 재래종 동식물이 먹을 것이 없어 고사할 지경이라니, 한때 우리나라 하천을 지배했던 베스나 황소개구리 같은 외래종이 끼친 피해가 생각날 정도다. 인간의 활동이 자연에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소한 행동 하나도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극지의 낚시꾼들은 낚시하고 남은 지렁이를 좋은 마음에서 주변 땅으로 방생한 경우도 있다니 하는 말이다.
아시아의 농업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던 오줌
이 책의 처음은 똥이다. 문명의 발달은 상하수도의 탄생으로 시작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도시에서는 수많은 인구가 배출하는 인분을 보이지 않게 처리하는 기술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생각을 바꿔 놓은 장면이 나온다. 밖에서 오줌을 보지 않고 참고 참다가 집에 와서야 배출했다는 제주도 민담이다. 더럽고 냄새나고 전염병을 옮긴다고 생각했던 오줌이 사실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름이 되는 오줌은 인간이 흙에 이로운 영향을 주는 중요한 활동 중 하나였을 것이다. 지금도 유기농에 오줌을 이용하는 사례는 있지만, 워낙 영양제와 약을 달고 사는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 오히려 흙을 오염시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그래도 세계 각지에서 발효 등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인분을 퇴비로 만드는 방법이 나오고 있다고 하니 희망을 놓지 말자.
외지인에게 땅을 준 진도 사람들
똥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땅에서 끝난다. 지구 곳곳을 누비던 작가는 한반도의 끝자락, 진도의 이야기로 마지막 장을 장식한다. 이 장에는 죽음이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울돌목에서 죽은 일본 수군들을 예를 갖춰 묻어준 왜덕산, 작가의 매장 체험과 작가를 위해 씨앗을 뿌린 밭을 빌려준 진도 사람 김병철의 ‘돌아감’까지. 외지인에게 귀한 땅을 내주고 빌려준 진도사람들의 넓은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구는 생명의 순환이 일어나는 곳이다
권교정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라는 SF 만화에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나온다. 불치병에 걸린 샐리가 병을 숨기고 몰래 지구로 돌아오는 디오티마에 탑승하는 이야기다. 샐리의 병은 지구로 돌아오면 급속도로 악화되어 일주일이면 죽음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샐리는 죽더라도 지구에서 죽고 싶다고 한다. 모든 생명이 죽지만 다시 태어나는 곳, 지구는 생명의 순환이 일어나는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태어난 듯이 죽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그는 지구의 흙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인간도 흙의 숨을 쉬자
인간의 활동이 기후위기의 주범처럼 여겨지고 있는 세상에서 인간이 지구에게 어떤 이로움을 줄 수 있을까가 나의 오랜 고민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인간은 ‘잠깐 흙이 아닐 뿐’인 존재다. 지구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인간이 차지하는 시간은 티끌처럼 작아 보인다. 그런 인간의 활동이 극지를 습격한 지렁이처럼 지구 생태를 바꿔 놓고 있다. 인간도 흙의 숨을 쉬어야 한다.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존재가 살아서 숨쉬는 것이 흙의 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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