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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지렁이가 숲을 파괴한다고?" - 유경수 교수의 '텃밭 농부, 지렁이 그리고 지구' 특강 후기

아메바!(김충기) 2025. 12. 24. 13:14

"고마운 지렁이가 숲을 파괴한다고?"
- 유경수 교수의 '텃밭 농부, 지렁이 그리고 지구' 특강 후기

지난 12월 22일, 딱 동지날이었네요.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에서 특강이 있었습니다. 한겨레에서 선정한 올해의책 10권에 포함되기도 했고, 화제가 된 책 [흙의 숨]의 저자인 유경수 교수님의 강의와 저자와의 대화였습니다. 연구자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지만 매번 연구 이후에 논문에 쓰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아쉬웠고 이를 책으로 쓰기 시작해 나온 책이 바로 [흙의 숨]입니다. 도시농부들에게는 익숙한 똥이야기, 쟁기, 지렁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생각지 못한 새로운 사실과 관점이 또다른 흥미를 줍니다. 기대했던 강의를 듣고 그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텃밭의 가장 친한 친구, 지렁이에 대한 배신감?

도시농부에게 지렁이는 흙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표이자, 땅을 갈아주는 고마운 동반자입니다. 저 또한 텃밭 흙을 파다 지렁이가 나오면 반가운 마음에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습니다. 지렁이는 무조건 이로운 존재라는 믿음은 마치 바뀔 수 없는 진리같은 거였죠.
그런데 최근 『흙의 숨』이라는 책을 통해 접한 지렁이는 좀 달랐습니다. 이번 유경수 미네소타대학 교수님의 특강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됐습니다. 우리가 텃밭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믿었던 지렁이가, 어떤 생태계에서는 숲 전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침입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상식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내용에 아마 많은 분들이 한동안 머리가 멍했을 겁니다.

1. 흙에 대한 새로운 시각: '부활이 일어나는 뒤죽박죽의 세계'

강의는 흙에 대한 철학적인 정의로 시작되었습니다. 유경수 교수님은 원래 물리학을 공부하다 흙에 매료되어 전공을 바꾼 분이었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흙만 채취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온다고 했습니다. 과학 논문에는 담지 못하는 그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 『흙의 숨』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다는 설명에서부터 흙이 단순한 연구 대상을 넘어 인간과 자연을 잇는 매개체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흙을 '부활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은 것들이 들어가 새로운 생명을 지탱하는 순환의 공간이라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흙은 '뒤죽박죽'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흙 한 줌에는 수십억 년 전 마그마에서 굳어진 광물과 방금 식물 뿌리에서 분비된 유기물이 공존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물질과 시간이 뒤섞인 복잡계가 바로 흙입니다.
위스콘신대학의 토양학자였던 프란시스 홀(Francis Hole) 교수의 "인간은 잠깐 흙이 아닐 뿐이다"라는 인상적인 문구도 소개되었습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흙과의 연결을 갈망하고, 텃밭을 가꾸는 행위 역시 그 본성의 발현이라는 설명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 지렁이의 두 얼굴: 생태계의 공학자 vs. 침입자

우리가 알던 지렁이: 땅의 쟁기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지렁이의 역할이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확인했듯, 한반도처럼 지렁이가 원래부터 살아왔던 온대 지역의 농경지에서 지렁이는 토양 구조를 개선하고 비옥하게 만드는 중요한 '생태 공학자(ecosystem engineer)'가 맞습니다. 흙에 공기 길을 내주고 유기물을 섞어주는 고마운 존재인 것이죠.
우리가 몰랐던 지렁이: 만 년의 고요를 깨뜨린 침입자
하지만 강의의 핵심은 우리가 몰랐던 지렁이의 또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그 거대한 연구의 시작은 알래스카 오지에 사는 클라우디아라는 예술가와 그녀의 반려견 '파파우(Pawpaw)'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어느 비 오는 7월 밤, 파파우가 갑자기 설사를 시작했고, 클라우디아는 급히 차를 몰아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도로 위에서 꿈틀거리는 수많은 생명체가 비쳤습니다. 바로 지렁이였습니다. 그곳에서 10년 넘게 살며 지렁이를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녀는 충격에 빠졌고, 병원에서 돌아와 빗속에서 지렁이를 채집해 대학으로 보냈습니다. 이 작은 사건이 알래스카 생태계를 뒤흔들 거대한 변화의 첫 신호였습니다.
미네소타, 알래스카, 스칸디나비아반도 같은 북쪽 지역에서 지렁이는 생태계를 파괴하는 심각한 침입 외래종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빙하기의 유산: 약 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거대한 빙하가 이 지역들을 덮으면서 토착 지렁이를 모두 전멸시켰습니다.
2. 느린 자연 확산: 빙하가 물러난 후에도 지렁이는 자연적으로 1년에 고작 5~10미터를 이동할 뿐입니다. 따라서 지난 만 년 동안 이 광활한 지역에 스스로 다시 정착할 수 없었고, 이 지역의 숲은 '지렁이 없는 환경'에 맞춰 진화했습니다.
3. 인간이라는 운송 수단: 결국 이 고요한 숲에 지렁이를 옮긴 것은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텃밭 흙에 딸려 오거나 낚시 미끼로 쓰고 버리는 행위가 주된 원인이었죠. 와이즈먼(Wiseman)이라는 마을에서는 누군가 숲에서 지렁이를 봤다는 소문이 돌자, 마치 "호랑이를 본 것처럼" 온 마을 사람들이 전설 속 동물을 보러 숲으로 몰려갔다는 이야기는 저처럼 흙만 파면 지렁이를 만나는 농부에겐 기묘한 충격이었습니다. 심지어 페어뱅크스의 월마트에서 '캐나다 지렁이(Canadian Nightcrawlers)'를 낚시 미끼로 사 와 자기 텃밭에 뿌려주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인간이 얼마나 강력한 전파 매개체인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3. 지렁이가 바꿔놓은 숲의 풍경

수천 년간 지렁이 없이 진화해 온 숲에 지렁이가 침입하면 극적인 생태계 변화가 일어납니다.
Before (지렁이가 없던 숲): 원래 이 숲의 바닥은 10cm 두께의 낙엽이 쌓여 매우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상태였습니다. 이 두꺼운 낙엽층은 토양을 보호하고 수분을 머금는 스펀지 역할을 했으며, 흙 속은 곰팡이들의 균사들이 촘촘히 얽혀 전체적인 구조를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After (지렁이가 들어온 숲): 침입한 지렁이들은 이 두꺼운 유기물층을 전부 먹어치우고 광물질 토양 속으로 섞어버립니다. 그 결과 푹신하던 숲 바닥은 딱딱한 광물질의 맨땅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농경지에 유익한 표토층(A층)이 새로 생겨나지만, 숲 생태계에는 재앙적인 변화입니다.
사라진 낙엽층이 불러온 연쇄 반응
• 낙엽층에 둥지를 짓던 특정 새(명금류)와 낙엽층을 서식지로 삼던 도롱뇽 같은 양서류의 서식지가 파괴됩니다.
• 낙엽층의 보호를 받던 어린 단풍나무 싹이 사슴에게 쉽게 노출되어 먹힙니다. 이로 인해 특정 식물 종의 생존은 어려워지고, 먹이가 많아진 사슴의 개체 수는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 흙 속의 주요 분해자가 곰팡이에서 박테리아로 바뀌면서 생태계의 근본적인 구조가 변합니다.

4. 기후 변화의 새로운 변수, 북극의 지렁이

이 문제는 단순히 한 지역의 숲 생태계를 넘어 지구 기후 위기와도 연결됩니다.
전 세계 토양, 특히 북쪽의 영구동토층(동토)은 대기(약 800기가톤)보다 훨씬 많은 약 2,300기가톤(1기가톤은 10억톤)의 탄소를 저장하고 있습니다. 지렁이는 이 탄소 덩어리인 유기물층의 분해를 급격히 촉진하여, 땅속에 갇혀 있던 탄소를 이산화탄소(CO2) 형태로 대기 중에 방출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유기물층은 땅을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해주는 천연 단열재 역할을 합니다. 지렁이가 이 단열재를 없애버리면 토양 온도가 상승하고, 이는 영구동토층의 해빙을 가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중요한 여지를 남겼습니다. 지난 20~30년간의 관찰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지, 장기적인 미래는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 유기물이 급격히 분해될 때 그 속에 갇혀 있던 질소가 대량으로 방출되는데, 질소가 부족했던 북극 생태계에 갑자기 비료가 쏟아지는 셈이 되어 식물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생태계의 반응은 단순하지 않기에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5. 도시농부의 딜레마, 그리고 희망

강의를 들으며 자연을 가꾸고 사랑하려는 텃밭 농사의 행위가, 어떤 지역에서는 오히려 해로운 침입종을 퍼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텃밭 농부의 모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알래스카 최초의 와인메이커를 꿈꾸는 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포도밭을 만들기 위해 50cm 두께의 유기물 매트를 걷어내야 했는데, 나무뿌리들이 얽히고설켜 있어 불을 질러도, 트랙터로 끌어도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지난한 작업 끝에 땅을 개간하자 파낸 곳 옆으로 호수가 생겨났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렁이가 없는 땅과 있는 땅이 근본적으로 얼마나 다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에 지렁이가 없었던 생태계에 국한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교수님은 질의응답을 통해 "한반도에서는 지렁이가 원래부터 함께 살아온 자연스러운 생태계 구성원이므로, 텃밭에 이로운 존재가 맞다"고 분명히 선을 그어주셨습니다.
강의는 이 딜레마 속에서 희망을 보여주며 마무리되었습니다. 교수님은 텃밭 농부들을 '최고의 시민 과학자'라고 칭했습니다. 자연을 누구보다 주의 깊게 관찰하고, 끊임없이 배우려 하며, 자신이 속한 생태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흙을 더 깊이 이해한다는 것

유경수 교수님의 강의는 지렁이를 악마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하나의 생명체가 생태계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전적으로 '맥락'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우리가 좋다고 믿었던 것이 다른 환경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생태학의 깊고 복잡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를 듣고 난 후, 텃밭의 흙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도시 농부들이 해야 할 일은 계속해서 배우고, 우리의 작은 행위가 더 넓은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흙과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교수님이 말씀하신, 우리가 흙에 더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좀 더 진보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PS. 오랫만에 도시농부들의 공부에 대한 열정이 보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만큼 도시농부들에게 흙이야기는 너무나 친근하면서도 어려운 것이고, 일상적이면서도 아직 잘 모르는 게 많은 분야인 것 같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거의 모든 분들이 책을 가지고 저자의 친필 사인을 받았습니다. 친필로 적어주신 "좋은 흙 되세요"라는 문구가 아주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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